UPDATE : 2024.2.28 수 22:25
상단여백
HOME 교계 인물
성결인 인물 조명-이명직 목사(4)대부흥운동기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09.04.06 16:44
  • 호수 0
  • 댓글 0

 

 

대부흥운동기


 1921년의 부흥성회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는가?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이명직은 자신의 체험 이후 모든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심령의 변화에서 찾으려는 사상을 굳히게 되었다. 이 사상은 지금까지도 성결교회 부흥운동의 핵심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이‘사회’라는 또다른 차원과 만날 때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박명수 교수는 1921년의 부흥운동이 그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도리어 새 시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이 부흥운동을 계기로 이명직 목사의 사상은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첫째로 그는 과거와는 달리 반(反)학문적인 자세를 견지하게 되었으며 결국 반지성적으로 되는 것이 참 신앙적이 되는 것처럼 이해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민족의 문제에 대하여 도피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즉 사회참여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뜻이다. 셋째로 이명직은 남녀의 문제에 대해 다시금 봉건적인 유교윤리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921년의 대부흥운동은 1920년대에 한국성결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토대를 마련하여 준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지금의 한국성결교회 신앙의 원형이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명직의 극보수적 사상이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성결교회의 사회참여를 저해하였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적극적으로 신(新)문화와 신(新)사고를 습득하려고 노력했었고, 이것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했던 인간 이명직의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선택한 극보수화의 길은 개방적이었던 그가 마지막으로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길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성결교회 발전과 이명직
 1920년대의 부흥기를 지나 1930년대를 들어선 한국성결교회는 이전보다 더 강한 전도정책을 수립, 진행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타 교단이 사회봉사, 농촌봉사에 주력하면서 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면 성결교회는 지방은 물론 해외에까지 직접 전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성결교회는 엄청나게 교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좋지 못한 사건도 있었는데 하나님의 교회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직접 전도에 총력을 기울인 성결교회
 한국성결교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07년의 복음전도관 시대부터 한국 성결교회의 전도정책은 직접 전도 방식이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는 교파 설립이나 선교 사업이라는 사업적 정신 보다는 오직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타 교단처럼 교육이나 의료를 통한 간접전도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즉 의료사업 계통으로는 전무했고, 교육기관은 단지 성서학원 한 군데에 지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야 몇 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정도였는데, 그나마 본 교단에 소속된 개인에 의해 운영되는 실정이었다.

 물론 이처럼 직접선교에 더 강조점을 둔 데에는 타교단과 같은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하는 외국의 교단적 선교부가 없었다는 사실에도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이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초기의 복음전도관의 선교목표가 목회보다 전도에 있었고, 따라서 단기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직접전도 방식을 채택했다는 데에 있다.

기독교헤럴드  admin@evanholy.co.kr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

기독교헤럴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