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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의 말 장난인가? 하나님 말씀의 전달인가?양진우 기자의 이슈추적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09.04.0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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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강단에서 잘못 내뱉은 사건들로 권위 실추된 한국 강단

상황에 따라 말 바꾸는 소피스트가 아니라 진리 전달자 소망


 이미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된 바 ㅊ원·ㅈ교회 ㅈ목사는 작년에“젊은 여집사에게‘빤스(팬티) 내려라, 한번 자고 싶다’해보고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똥이다”라고 설교하여 파장을 일으켰고, 선거철에는 "무조건 ○○○ 찍어! ○○○ 안 찍는 사람 내가 생명책에서 지워 버릴거야"라고 발언함으로써 강단 설교의 진위성 논란을 일으켰고, 올 말에는“우리 교회 성도들은 목사인 나를 위해 죽으려는 자가 70% 이상이다. 내가 손가락 한 개 펴고 다섯개라 하면 다 다섯 개라 한다”고 하여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종인지, 하나님이되어서 명령하는 자인지 혼란스럽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ㅅ 교회 ㅇ 목사는 지난 9월에“광주 5. 18 사건도 북한 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면서 명확한 증거가 있다고 설교하여 단상에서의 정치 발언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한국 일부 강단은 예수의 순수 복음보다 기복신앙을 강조한다. 나두산 목사(빛과소금의교회)는“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불어 닥친 부흥회(심령대부흥회)열풍은 당시 경제 5개년계획이라는 레퍼터리로 성장주의를 펼친 정권과 무관하지 않다. 성장주의 열병을 앓고 있는 목회자의 침 튀는 설교는 큰 교회 가면 일류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고 작은 교회를 우습게보고, 농촌 목회자를 무시하게 만들었다. 약하고 없는 사람보고 축복 받으라고 윽박지른다. 그리고 가진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미사여구에 능한 설교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말 잘하던‘소피스트’가 생각났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에 그리스에 소피스트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원상 소피스테스(sophistes)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소피아 sophia, 지혜)에 테스(tes, 잘 다루는 사람)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지혜로운자’라는 의미이다. 즉‘지혜의 스승’이라는 단어이다. 소피스트는 아테네의 문화와 경제가 번성기에 나타난 사람들이다. 그리스 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한 사람들이고, 민주주의가 꽃피던 전성기의 사람들이다.

 그리스 문명은 도시국가 내부의 종족 갈등의 변화가 심했다. 갈등해소를 위한 법학교육 요구의 수요에 부응했던 사람들이 소피스트이다. 경제적, 문화적 번성기에 교육의 수요가 늘었을 때 소피스트가 등장하게 된다. 정치에서 출세하려면 연설을 잘해야 했다. 회합, 법정에서 이기기 위해서 말을 잘하는 능력을 키워야 했는데 그러려면 교육을 받아야했다. 이들은 신화적 세계에서 탈피해서 학문적이고, 과학적 세계관을 보급하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계몽주의자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소피스트들이다. 소피스트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소피스트가 여러 개의 주장을 소개하다 보니 무엇이 진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사회적 욕구에 맞춰살기 위해서 법정 진술 방법과 내용을가르쳐 주어야 했다. 법적 진실에 대하여 다양한 지식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각국의 법을 가르쳐야 했기에 그런 지식이 있었다.

 이들은 보편적인 기준과 어떻게 살 것인가가 의미가 없어지고, 소피스트들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 맞추어서 살기만 하면 되었다. 어떤 것이 진리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그 사회 문화에 잘 맞추어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겨졌다.

 이러한 대표적인 모습이『국가』라케스 편에 나온다. 여기에서‘용기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한다. 당시에는 가장 사람다운 사람은 용기가 있고 전쟁에서 잘 싸우는 사람이었다. 사람의 핵심적 가치는 군사적 가치이고, 잘 싸우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장군 출신의 소피스트에게“용기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였다. 라케스는“자리를 지키면서 끝까지 싸우는 것이 용기”라고 말했다.“ 기마병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우두커니 서 있으면 비겁한 사람이 아닌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싸우는 자가 용기 있는 자일 수도 있잖는가?”라고 질문하자 당황한 라케스는“상황에 따라 끝까지 싸우는 것이 용기이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성급하게 싸웠을 때 퇴각 명령을 하면 비판 받을까봐 장군이 끝까지 공격 명령하면 어떤가?”라고 말하자, 논리에서 자꾸 밀린 라케스는“끝까지 싸우든, 안 싸우든 이기는게 용기”라고 말을 바꾼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이긴 것만이 용기인가?”라고 다시 의문을 제기하였다. 상황에 따라서 자리를 지킴과 지키지 않는 것에 용기가 적용이 다 된다. 소피스트는 동일한 사태에 대립되는 개념이 적용될 수도 있다.

 이는 실증주의적이고 감각주의적인 태도이다. 대상을 어떻게 감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주관주의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상대주의적(relativism) 태도이다. 상대주의는 처해 있는 시간과 장소의 상황에 따라 진리가 다르다는 입장이다. 급기야 소피스트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동일한 개념이 어떻게 다른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현대 사회의 소피스트적 태도를 반성해 보고, 소크라테스처럼 물어 볼 필요가 있다. 네가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너자신을 알라”. 이 말은 아폴로신전 문에 걸려 있던 격언이다.“ 네가 죽을 수 밖에 없던 존재임을 알라”는 뜻이었는데, 소크라테스의“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절대주의이고, 보편주의이고, 객관적인 것을 알라는 말이다.

 우리 시대가 소피스트 같은 시대이다. 지식이 많고 개성이 강한 시대이다. 많은 것을 보게 만든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돌보지 않게 만든다. 많은 설교자들이 청중의 문화적 감각에 맞추려고 하고, 가정 문화의 변동에 맞춰 진리를 가리기도 하며 강하게 보이고 싶을 때는 하나님 만이 할 수 있는 모든 선악의 구분을 인간이 다 하기도 한다. 깊은 사유에서 나오는 말씀보다 상황에 따라 다른 말씀이 나온다. 이제는 순수한 복음이 설교되어지길 바란다.

 지금 이 시대에“무엇이 진리인가”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업그레이드 해 놓으면 다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위기라는 것이다. 이젠 이 시대의 전체 흐름과 다른 길이라서 외롭더라도 진리, 정의, 평등, 사랑, 용서, 화해 등 본질적인 것에 다시 눈을 돌려야 할 때이다. 한국 교회 일부 강단에서 물질신 맘몬신과 바알 신의 축복 논리를 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소피스트’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더라도 진리를 외치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증인’이 아쉬운 시대이다.

 

양진우 기자
- 본지 기자
- 숭실大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숭실대 대학원 철학
과 박사과정 수료

기독교헤럴드  admin@evanho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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