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론과 합리론

  고전적 전통에서 인식론은 대상이 먼저 주어져 있고, 그 대상은 감각기관을 통해 파악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특히 영국의 경험론을 대표하는 인물은 로크와 버클리이다. 로크(John Locke)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백지상태(타불라 라사, tabula rasa), 즉 아무 것도 없는 상태”라고 보았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서 백지상태인 마음에 사물이 인식되고 그 대상이 들어와 관념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는 경험론의 출발점이었다. 로크의 경우, 인식되기 이전에 대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커피를 마시거나 커피 잔을 직접 감각기관으로 경험하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론은 버클리(George Berkeley)에 와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명제를 통해 어떤 사물이 지각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물론 이러한 경험론은 “사물이 지각되지 않을 때 과연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인간의 외부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이 감각적인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경험론과는 달리 합리론은 인간의 경험이 기만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합리론자들은 시냇물의 온도가 겨울에는 차갑고, 여름에는 따뜻하게 느껴지듯, 경험은 인식의 원천으로는 부적절하다고 보았고, 이를 적절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성적 능력은 인간의 시시각각 달라지는 경험과는 달리 ‘이미 주어져 있는 이성적 활동’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선이란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이다.”라는 정의는 경험과 무관하다. 여기서 바로 경험론과 달리 합리론은 “경험은 주관적인 지식에 불과하지만, 합리론은 보편적이고, 필연적 원리가 작동하고 그 원리는 인간의 이성”이라고 보았다. 이 합리론의 시작은 데카르트(Rene Descartes)였다. 그는 맹목적인 경험적 지식을 추종하지 않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는 사유를 주장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말은 바로 사유, 자아의 성찰을 통해 감각적 경험이 아닌 내면적 성찰에서 인식이 시작된다고 언급했다.

선천적 종합판단

경험론과 합리론의 공통점은 후천적인 경험과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칸트(Kant)는 이 두 원리를 모두 종합한다. 그래서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경험과 순수이성의 두 영역을 하나로 연결시켜 ‘선천적 종합판단’이라는 원리를 도출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경험 이전에 ‘선천적’인 지식이 분명 존재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경험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지식이 있었고, 그 지식은 대상을 파악하는 원리로 작동되었다. 바로 이성과 오성의 영역이다. 오성은 감각적인 대상을 파악하는 형태로 ‘지각’을 일컫는 말이며, 이성은 오성의 영역에서 지각할 수 없는, 신(神), 자유, 영혼의 불멸을 알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보았다. 오히려 칸트는 공간과 시간의 두 범주에서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만 지각할 수 없는 영역은 이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봄으로써 신(神)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간혹 하나님을 경험 지각의 대상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밝은 빛을 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알기’를 지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각을 넘어서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그 분은 우리 눈 앞에 ‘경험’의 대상으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으로 다가오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는 물체의 지각으로 느끼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영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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