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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사건에 대한 신학적 분석요즈음 벌어지고 있는 테러사건은 정당성 없어, 아담 이후 '선과 악'의 심판권 인간이 빼앗아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09.04.0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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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월에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잇달아 발생한 테러 사건에 대한 기독교인의 시각 조명

“무작위적 대상의 테러는 악마적 범죄”

인간이 20세기 한세기 동안 전쟁과 테러를 통하여 살상한 숫자가 1억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인류 최초의 가정부터 지금까지 왜 살상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고찰을 해 보아야 할 때이다.

요즈음 지구는 테러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다. 테러(terror)라는 말 뜻은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이다. 즉 상대편을 공포에 빠뜨려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다. 공포에 빠뜨리려면 최대한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야 하는데, 치명적 타격을 가하려면 대량 살상을 감행해야 한다.

11월 26일 인도는 뭄바이 테러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부상 당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서 테러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범죄라는 생각을 하였다.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사는 서민들이 주로 애용하는 것이 지하철과 버스이다. 이들은 전쟁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그런데 이들을 대상으로 위력이 엄청난 폭탄을 터뜨리고 총격을 가한 것이다. 오히려 정책을 결정하고, 테러 대상 지도급 인사들은 지하철과 버스를 타지 않고 삼엄한 경호 속에 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테러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하는 것도 아니요, 상대편에게 위협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테러를 감행한 자들이 도덕적으로 지적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로 테러의 희생자는 선량한 서민들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무작위적인 대상으로 한 테러는 악마적 범죄이다.

인도라는 나라도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간디라는 인물이 세계적 위인으로 존경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비폭력 무저항으로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을 대상으로 테러를 감행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던 사정이었지만, 비폭력 무저항의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존경받고 승리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면 왜 인간은 비폭력 평화의 방법 보다는 살상의 방법을 택하려는 것일까? 테러에 대한 신학적 답변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오늘날 전쟁과 테러라는 상황(context) 앞에서 신학적 검토를 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먼저 살펴 봐야 할 것은 왜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느냐의 문제이다.

첫째, 자기가 선과 악의 판별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에덴동산 한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두그루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동산 모든 나무 실과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뱀의 꾀임에 빠져 실과를 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였다. 이 탐욕이 죄의 뿌리가 된 것이다. 현재도 모든 전쟁의 이유가 이 탐욕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보니 먹고 나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질 것 같았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 실과의 이름을 자세히 보라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이다. 그렇다! 그 실과는 선과 악을 알게 만든다. 선과 악의 판정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 되면서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니까 내가 너를 심판하여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다. 부부 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자기가 악이라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모두가 자기는 선인데, 상대가 악이라고 주장한다. 나라와 나라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역사 이래로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의 젊은이들이 애국과 정의를 위해서 총을 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상대에서도 똑같이 주장할 경우 절대선은 어디 있는 것인가? 테러리스트들의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기가 악을 심판하기 위해서 소중한 자기 생명을 던져서 폭탄 테러를 하였는데, 결국 자기는 선이지만 당한 사람들에게는 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을 인간이 붙잡고 자기가 휘두른다면 이는 엄청난 신성 모독을 하는 것이다. 선과 악의 심판권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타락한 인류가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길이다.

둘째, 가인의 후손과 아벨의 영향이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심판권을 갖고자 하는 탐욕어린 인간의 첫 번째 가정에서 살인 사건이 났다. 아벨이 상대가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면 가인이 쉽게 죽였을까? 아마도 슬그머니 뒤에서 돌로 내리친 것은 아닐까? 이것이 테러의 시초이다. 상대에게 대화와 설득, 회개와 죄 사함, 용서와 화해라는 힘든 과정을 거치기 보다는 무력으로 상대를 쉽게 제압해 버리려는 인내 부족의 행위이다. 아벨은 어떠했는가? 하나님께 인정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정죄받아 맞아 죽었다. 그냥 맞아 피흘려 죽은 것이다. 어떠한 저항도, 어떠한 변명할 시간도 없이 그냥 맞아 피흘려 죽은 것이다. 그 가인의 후손은 도시 문명을 만들어 가며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여 결국은 홍수의 심판을 맞이 하게 되었다. 그 가인의 후손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힘없는 자들을 돌로 쳐 죽이고 있다. 그 돌은 미사일, 항공모함, 전투기, 그리고 자살 폭탄 테러 등으로 바뀌었다. 손에 든 것만 바뀌었지 그 심성은 그대로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인의 손에 들려졌던 돌이 채찍과 창으로 변하여 아벨처럼 그냥 맞아 죽으셨고, 못박히고 창에 찔리고 피흘려 죽으신 것이다. 오늘날도 끊임없이 가인의 후손과 아벨의 영향은 이어지고 있다. 칼로 일어난 자는 누구든지 가인의 후손이다. 자기 성질대로 돌로 내리치는 것보다 피흘려 가면서 맞아 죽어가는 것이 더 힘들다. 그래서 인류는 어려운 방법인 좁은 문을 택하기 보다는 보다 쉬운 넓은문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미련하게 맞아 죽어가는 아벨의 피의 울음 소리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제사로 이어져 죄 사함과 용서, 화해와 일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가인의 후손인가? 아벨의 후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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