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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있는 첫 계명유다의 부모는 그를 훌륭한 소년으로 생각 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찬송’을 의미하는 유다란 이름을 받았다. 이 총명한 소녀이 장난치며 노는 것을 지켜보면서 도대체 누가 먼 훗날에 성육한 진리께서 그의 대하여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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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5.0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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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불효한 자,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어

유다의 부모는 그를 훌륭한 소년으로  생각 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찬송’을 의미하는 유다란 이름을 받았다. 이 총명한 소녀이 장난치며 노는 것을 지켜보면서 도대체 누가 먼 훗날에 성육한 진리께서 그의 대하여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하다”라고 말씀 하시리라고 상상 할 수 있겠는가. 

 

가롯 유다는 부모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간 패룬아였다.

인간은 크게 두 가지로 관계를 맺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요. 둘째는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다. 그런데 이 수평적 관계의 으뜸은 부모님과 자식 간의 관계다. 그래서 그 첫째 계명이 자식은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 하실 때 “보소서 아들입니다 보라 내 어머니다. (요19:27)” 이 말씀은 아들로서 어머니에 대한 효행의 표시로서 어머니의 내일을 준비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혈연관계를 초월하거나 그것을 무시 하지도 앉는다. 그리스도께서는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가 바닥 나서 곤란에 처했을 때 그것을 해결해주신 어머니의 노후를 생각하셨다. 결혼과 부모 그리고 가족 관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일 수가 없으나 그것이 존재하는 한 경시할 수 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관계를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기반을 두어 더 의미 깊게 만들어 주셨다.

바울은 자녀들에게 계명을 순종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하면서 그것이 첫 계명이라고 하셨다. 부모님을 공경 한다는 것은 말 뿐만 아니라 참으로 순종하고 존경하여 가슴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한 편만 보아 자녀들의 의무만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들에게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특별히 아버지를 꼬집어 말 한 것은 인자한 어머니보다 아버지들이 분을 내기 쉽기 때문이다. 골 3:21에 아버지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하니라  젊은이들에게 낙심은 금물이다. 생을 자포자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 (Byron)은 선천적인 절름발이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무시와 경멸을 받았다. 부모는 그 육체적 결함에 대해서 비웃었다. 그래서 그는 좌절과 환멸을 느끼고 인생을 냉소하는 방탕아로 자라다가 고향을 등지고 방탕의  길로  나섰다.  35세의 나이로 머나먼 타향에서 죽어가면서 이런 시를 썼다. 나의 삶은 노란 꽃잎 속에 있네/사랑의 꽃과 열매들은 떨어져 버렸고/ 벌레와 상처와 슬픔만이 나의 것이네. 우리의 몸은 밥을 먹고 자라지만 우리 정신과 인격은 부모님의 사랑을 먹고 자라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들어간 학교는 어머니라고 하는 사랑의 학교다. 어머니는 최초의 스승이었고, 어머니의 얼굴은 우리의 교과서였고, 어머니 무릎은 우리의 교실이었다. 어머니 말씀은 다시 없는 귀한 말씀이었고, 사랑의 비타민이었으며, 어머니의 손끝은 우리들의 천국이었다. 이런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은 자녀의 마땅한 도리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셨는데 처음 4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나머지 5계명부터 10계명 까지는 인간 상호간의 계명이다. 그 첫째 계명이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이었다. 효도는 하나님의 대한 믿음의 기초다. 부모님께 효도한 자는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어긋나지 아니한다. 부모님께 불효한 자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효도하는 자녀에게 최고의 복을 허락하셨다. 조선 오백년간은 유교가 정치 중심이었는데 유교의 중심은 충효 사상 이었다. 이 훌륭한 전통은 수많은 충신과 효자를 배출 했다. 그러나 내면적 생명력은 상실되고 시대의 흐름과 함께 껍데기만 남았다. 그래서 충과 효의 사상은 제사의식 형식 등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성경이 가르친 효는 이렇게 형식화된 효사상에 다시 생명력을 가져다준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효도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참 어머니의 모습을 갖도록 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한 어머니로 자신의 어머니를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효도이다. 요즘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부모님께 무관심하고 냉대하는 풍조에 깊이 침륜 되었다. 그래서 늙으신 부모님들은 고독하다.

이 고독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서 찾아온 고독이 아니라 이웃과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이다. 이 고독을 누가 치유할 수 있겠는가.

자녀들이 부모님께 용돈주고 자주 찾아보고 잘 사는 모습을 통해서 해결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원초적인 고독은 절대와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이다. 그러므로 참된 효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시켜주므로 고독을 치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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