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석매교회, 서울신대 총동문회 회장)

작가 김난도 씨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있다. 젊음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나 불안, 상실감이 뒤따르며, 이 고통과 아픔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청소년이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가는 청년들을 사랑과 성장으로 이끌어준다는 얘기다.

고통 공포

하지만 오늘날은 어디서나 고통 공포, 즉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고통에 맞서려 하지 않는다. 아프면 무조건 병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의학적으로나 심리적인 진통제를 요구한다. 진통사회는 ‘좋아요’의 사회다. ‘좋아요’는 우리 시대의 진통제다.

행복 강요

현대는 ‘행복하라’라는 말이 새로운 지배 공식이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하게 사는 데 있다. 또한 오늘날 행복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생존

바이러스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고통 공포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다. 팬데믹은 우리가 억압하고 밀어낸 죽음을 다시 가시화했다. 팬데믹에 직면한 생존 사회는 예배마저 금지한다. 자본주의에는 좋은 삶에 대한 서사가 없다. 자본주의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고통의 무의미함

오늘날은 고통이 무의미한 것으로 지각된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감내하는 기술을 완전히 상실했다. 반면에 기독교 신비주의자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자서전은 고통과 함께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독교 서사는 고통을 언어화하고, 고통은 내밀함과 강렬함을 낳는다.

오늘날 고통은 오로지 육체적 고통으로 사물화되었다. 고통이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었다. 고통이 의미를 지니려면 삶을 의미 지평 안으로 편입시키는 서사가 먼저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고통이 더 나은 행복을 얻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탈서사적 시대에 살고 있다.

고통의 간지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착각하지만 “평균적인 안락함을 위해 고통을 가장자리로 밀어냄으로써” 만들어진 것들이다. 오늘날은 주로 심리적 긴장이 고통을 낳고 있는데, 이런 긴장은 신자유주의적 성과 사회의 특징이다. 성과 주체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다. 성과 주체는 쓰러질 때까지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한다.

진실로서의 고통

이별이 고통을 줄 때, 그 이전에 맺어졌던 결속이 진실했음이 입증된다. 진실만이 고통을 준다. 그러므로 고통은 결속이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을 줄 수 있는 깊은 관계를 피한다.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 것이다. 또한 고통은 현실이다. 고통에는 현실을 깨닫게 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주는 저항이 있을 때 현실을 지각한다. 고통은 지각을 강화한다. 실존감 또한 고통이 있어야 가능하다.

고통의 시학

글쓰기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의 대가다. 카프카는 두려움으로 인해 잠들 수 없을 때 글을 쓴다고 했다. 어린 시절에 병에 시달렸던 프루스트도 힘든 고통 속에서 글을 썼다. 이런 글쓰기의 열정은 고통 없이는 불가능하다. 슈베르트 또한 매독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겨울 여행》의 교정쇄를 손보았다. 그의 작품들은 사랑과 고통을 노래한다.

하지만 사회의 전반적인 마취화는 고통의 시학을 모조리 소멸하며, 고통의 미학을 몰아낸다. 프랑스 작가 미셸은 현대 사회가 문학의 위기를 맞이했다고 진단하며, 문학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능력을 상실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에 노출되는 걸 원치 않는다. 다시 말해 햇볕 아래의 글쓰기만을 허용한다.

고통의 변증법

정신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새로운 인식에, 더 높은 앎과 의식의 형태에 도달한다. 고통은 정신을 변환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정신은 언제나 동일한 상태에 머무르며, 기존의 것과 근본적으로 결별하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지능은 구별 능력이다. 따라서 지능은 기존의 것들을 벗어나지 않는다, 지능은 완전히 다른 것을 산출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지능과 정신은 다르다.

고통의 윤리학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소비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폭력 영상에 대해서도 포르노 그래피적인 태도를 취한다. 포르노 그래피적인 폭력 영상은 진통제처럼 작용한다. 이런 영상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둔감하게 하고 무관심에 빠져들게 한다.

타자에 대한 감수성은 “고통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노출하는” ”노출됨“을 전제로 한다. 이 노출됨이 고통이다. 그것은 타자를 위한 고통이다. 오늘날은 노출됨, 타자로 인한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우리 영혼은 타자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하고 둔감하게 만드는 굳은살로 온통 뒤덮인 듯하다.

독서 후기

성경 시대나 중세 시대는 폭력이 권력자들의 지배 수단이었다. 봉건주의 조선 시대나 일제 강점기는 고문이 정당화되었고, 심지어 불법 감금이나 고문이 자행되는 공포정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격동기의 성도나 시민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성경은 의를 위한 고난이나 고통을 결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베드로 사도는 선을 행하다가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것을 ‘아름답다’고까지 했다.(벧전2:19~20)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자를 복이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개인의 성취나 성과를 위해서만 희생하는 사회다. 성과 사회는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자신을 착취하게 한다. 고통을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신호로서 이해하지 않고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으로 간주할수록 고통 자체를 회피하려는 욕망은 강화되고, 우리는 작은 고통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현대인들은 고통에 저항하면서 더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 슬럼프, 탈진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고통을 회피하는 의학적, 심리학적(긍정 심리학) 기술이나 처치에 더 매달린다. 의학은 고통의 원인을 그대로 둔 채 고통 자체만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진통과 마취에 집중한다. 저자는 이것들이 근본적 해결책이 아님을 지적한다.

이 책을 읽고 나 또한 단련된 철과 같이 고난을 통과할 성도를 양육하기보다 현재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진통제를 놔주는 목회자가 아니었는지 반성한다.

한병철, 『고통없는 사회』 이재영 역, 서울: 김영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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