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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 <184>발칸, 두브로브니크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4.07.09 15:32
  • 호수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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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익숙함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거기 어디 아늑함과 만족함만이 가득하겠는가. 사실은 둘째 날부터 나는 열무김치 생각이 났다. 그 아삭하고 시원한 식감. 처음 김치를 담을 때의 맛과는 너무나 다른, 알맞게 익었을 때의 그 오묘한 맛, 고슬고슬한 밥에 살짝 익힌 국물을 얹어 비빌 때의 그 화려한 조합은 유럽 어디에도 없다. 이젠 어딜 가든 아무런 음식도 가져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안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여행은 색다른 빈곤이기도 하다.

발칸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지상의 낙원이라는 별호를 지니고 있다지만 사람이 만든, 그것도 아득한 세월의 저쪽에서 만들어서 또다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성이었다. 나무도 그렇지만 오래된 건물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마치 그 건물이 자연이라도 되듯이 경도 당한다. 버스 안에서 드보르브니크의 성채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랬다.

압도! 경도! 무릎 꿇고 싶은 마음! 어제는 은꿩의다리를 찾아 읽고/오늘은 금꿩의다리를 찾아 읽네/야생의 풀꽃 경(經)에 빠지다 보면(하략) 풀꽃에 독경하는 시인도 있지 않은가. 성인지 성벽인지, 요새인지, 그 모든 것들을 합한 것, 동로마, 헝가리 러시아 몬테네그로 프랑스 오스트리아제국 유고슬라비아라는 숱한 나라들을 거쳐 지금은 크로아티아라는 이름을 지닌 곳, 약 2km에 걸쳐 옛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성벽을 걸었다. 성벽은 최고 25m 높이도 있고 견고한 성벽의 두께는 6m에 이른다고 한다. 바다야 천연의 해자일테고 육지에도 해자를 팠다고 한다. 성벽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오래된 마을. 그 마을을 통째로 성벽은 마치 아기처럼 포옥 안고 있었다. 아주 독특한 경험이었다. 사람이 만든 길이지만 마치 자연처럼 느껴지던 그 길, 발을 딛고 서서 걷지만, 공중에서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지중해의 햇살이 찬연히 내리쬐고 있었고, 푸르른 하늘아래 붉은 지붕들이 꽃처럼 피어나 있다. 배로 한 바퀴 돌면서도 보고 산 위에 올라가서도 보았다. 그리고 성벽에 올라서서 걸었다. 걸으니 그제야 성벽이, 두브로브니크가 살짝 품을 열어 나를 안듯이 내게 스며들었다.

여행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어떤 지점을 향하는 것일까, 아드리아 해안의 바다를 바라보며 성벽을 걸을 때 바다는 오른쪽에 있었고 오래된 도시는 왼쪽에 있었다. 가끔은 바다를 향해 걷는 것 같았고 어느 때는 하늘의 공간을 걷는 것처럼도 여겨졌다. 공간이 사람의 의식을 바꾼다는 건축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건축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나만의 경험일지는 모르지만, 두브로브니카의 성벽 위에서 내가 그랬다. 구도시 사이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고 성벽 위 내 곁에도 엄청난 사람들이 함께 걷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혼자 걷는 것처럼 여겨졌다. 아득한 세월의 저편에서 누군가 한 사람 돌을 쌓는 것이 흘깃 보이는 듯, 그 작은 몸짓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벽이 오랜 시간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돌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가끔 오래된 존재들 앞에 서면, 무생명의 존재에서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성벽을 내려와 구시가지를 헤매다가 길거리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셨다. 따가운 햇살에서도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시원해졌다. 햇살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카페에 앉아서 에스프레소에 설탕 한 봉다리를 넣으며 문득 키리코의 그림 ‘거리의 우울과 신비’가 떠올랐다. 하얀 성이 빛나는 길, 아무도 없는 길을 어린 소녀가 굴렁쇠를 굴리며 지나가고 저 앞으로는 거인의 그림자가 보인다. 마치 소녀를 채갈 듯 마차 문은 열려있다.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로 향해 있는 길을 소녀는 굴렁쇠와 함께 달려온다. 어린 소녀도 혹시 그 환한 햇살이 두려운 것일까, 소녀의 불안을 잊게 하는 표상으로 작가는 굴렁쇠를 그려 넣었던 것일까, ‘거리의 우울과 신비’ 그 그림 속 그늘, 어두움, 어디쯤서 소녀를 바라보는 느낌, 아니, 그 소녀는 혹시 어린 시절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나그네의 정한이었겠지. 그 난데없는 상상은, 나그네 아닌 인생길이 어디 있으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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