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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작가 / 김현희의 문학작품 분석또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4.06.07 00:04
  • 호수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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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스토엡스키, 사진 출처: 위키백과 

라스콜리니코프(로쟈)가 지적 오만함과 자신의 잘못된 신념의 결과로 살인을 저지르고,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던 시간 속에 견딜 수 없는 심리상태로 자수하러 경찰서로 간다. 그는 오래전부터 히포콘드리적 정신상태에 있었다. 의사인 조시모프와 그의 옛 학우와 하숙집 여주인, 하녀 등 주변의 진술이 반증한다. 이런 정황상 로쟈는 흔한 살인 강도나 도둑과는 전혀 다른, 뭔가 좀 다른 것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거의 자기변호를 하려 하지 않았고, 살인을 한 것은 경솔하고 소심한 성격에다 가난과 불행에 화가 나 있던 신경 탓이었다고 했다. 자수한 이유는 양심의 가책이었다고 솔직하게 진술한다. 범인이 자수한 것과 죄의 경감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사실이 반영되어서, 불과 8년을 선고받고 사건은 끝났다. 범인이 자수하고 5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가 유형지로 떠나고 두 달 후 그의 동생 두냐와 그의 친구 라주미힌은 결혼했다. 홀로 남은 라스콜리니코프 부인은 딸의 결혼을 축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들 로쟈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슬픔 속에 산다. 9개월 후엔 돌아오겠다고 했던 아들의 말을 기억하고 아들이 쓸 방을 정돈하고 재회를 고대했다. 끊임없는 환상과 기쁨에 찬 꿈과 눈물 속에 불안한 하루를 지내던 어느날 열병이 발병하고 허무하게도 2주 후에 숨을 거두었다. 아들 로쟈가 당한 무서운 운명을 보는 근심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소냐는 로쟈의 유형지 근처에 유숙하며 꾸준히 로쟈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소냐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고, 화를 내고 말도 안 하고 심지어 난폭한 태도까지 보였다. 그러나 소냐의 방문은 습관으로 욕구로 변해간다.

로쟈는 소냐에게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고도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놀라는 건 오히려 소냐였다. 그는 지금의 자기 입장을 확실히 이해하고 미래에 관한 작은 희망마저도 품지 않고 있으며, 자기 속에 침잠해서 모두를 피하고 있었다. 그는 감옥의 동료 죄수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기도 하고, 며칠씩 침묵을 지키느라 안색이 나빠지기도 했다. 그를 점점 쇠약하게 만든 것은 유형 생활의 두려움도 아니고, 노역도, 짧게 자른 머리도, 바퀴벌레가 들어간 건더기 없는 수프도 아니다.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것은 상처받은 긍지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에 닿지 못했다. 과거의 죄를 시인하지 못하고 스스로 실패자라고만 생각했다. 그의 부끄러움은 로쟈 자신이 눈과 귀가 막힌 채 맹목적인 운명의 선고에 굴복해야 하는 환경이었다.

“현재에 있어선 대상도 목적도 없는 불안, 미래에 있어선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는 끊임없는 희생, 이것이 이 세상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8년이 지나도 겨우 32세니까 아직도 새로운 생활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런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면 좋을까?”

그는 사상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희생할 각오였다. 스스로 옳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부정당하는 듯 본인의 사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는데도, 인정할 수 없기에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로쟈가 열병으로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 창가로 멀리 병원 문 근처의 소냐의 모습을 본다. 문득 뭔가에 심장을 찔린 것 같은 느낌이다. 이후 소냐가 며칠째 보이지 않고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로쟈는 소냐를 걱정하는 자신이 결국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맑게 갠 따뜻한 어느 날 로쟈는 새벽에 강기슭의 작업장으로 나가 잠시 통나무에 걸터앉아 황량하고 넓은 강을 바라보고 있을 때 소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그와 나란히 앉았다. 그 만남으로 로쟈는 새 삶의 서광이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고,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의 마음을 적셔주는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 된 것이다.”

그날 밤, 로쟈는 감옥 나무 침대 위에 누워 그동안 소냐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이유를 회상한다. 아울러 지금부터 그녀를 위하여 자신의 남은 인생을 살기로 결단한다.

머리맡의 복음서를 집어든 로쟈는 “지금 그녀의 신념이 동시에 내 신념이 아닌가? 적어도 그녀의 감정, 그녀의 소망정도는 ...”이라는 생각에 닿는다.

한 인간이 잘못된 사상에서 벗어나 점차 올바른 생각과 삶으로 갱생해 가는 이야기,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점차 옮겨가는 과정에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가는 이야기이다.

“죄와 벌”에서 로쟈의 사상은 과연 타당한가?

1860년대 러시아 청년들 사이에서 ‘비범한 인간’ 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니체의 ‘초인사상’에 앞서 “비범한 사람에게는 살인을 포함해 모든 것이 허용 된다.”는 논리를 담고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로쟈)는 고결한 이상과 안목을 겸비한 엘리트지만 너무 가난해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비범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추악한 노파, 세상의 악한 존재라 정의하고 그 악을 죽이고 선량한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으로 살해한다. 정의 없는 세상, 추악한 노파에게는 돈이 넘쳐나고, 착하고 어린 여자아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의 살인 동기는 “정의 구현”이었다.

그 당시 도스토옙스키가 거주하고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시빈민과 일용직 노동자, 알코올 중독자들, 매춘부, 좀도둑들이 벼랑 끝에 몰리듯이 공포에 떨며 살고 있었다. 로쟈의 살인은 당시 유행하던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이라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따라 사악한 인간 한 명을 제거하여 사회 전체의 공리를 증진시키려는 실천인 셈이다.

실상, 로쟈는 사회정의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지만, 권력과 자존감의 극대화를 위해 정의의 이름을 빌려 살인 한 것이다. 그 살인으로 자신의 인간성에서 단절을 경험하고, 자신 혐오에 빠져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그 안에 갇힌다.

로쟈는 버러지들이 없어지면 세상은 훨씬 멋지고 깨끗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소냐의 생각은 달랐다. “누구는 살아야 하고 누구는 죽어야 한다고 심판할 권리를 누가 주었나요?”

도스토옙스키는 현재를 중요하게 여긴다. 현재의 풍요에 가치를 둔 것이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는 죽음도 노화도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더구나,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이들에게 이 시간을 실존에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채워 나가는 게 가장 가치로운 일로 여긴다. 미래를 향한 두려움을 접고, 오늘 내게 주신 현재 시간을 감사로 채워 천국을 누리라는 제안으로 받아들인다.

죄와 벌. 또스토옙스키, 박형규 역, 1990, 금성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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