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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권하는 사람들 / 전북지방회 독서클럽‘숲속의 자본주의자’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6.03 21:00
  • 호수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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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준 목사(기성 모현교회)

숲과 자본주의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숲보다는 도시가 자본주의와 잘 어울린다. 본 도서는 그런 어색한 또는 반전의 조합을 통해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얼핏 제목만 보아서는 번잡하고 복잡하며 치열한 자본주의의 상징인 대도시와 그 구조를 벗어나 숲속에서 살아가는 21세기 반항아나 방랑자의 이야기라 생각된다. 하지만 책이 말하는 것은 그와는 달랐다. 그보다는 가장 고상한 차원에서의 자본주의자 또는 최대한의 개인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자의 실험기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소로가 ‘월든’을 통해 말하는 가치관과 생각의 틀을 언급한다. ‘삶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 삶이라는 녀석의 골수를 전부 빨아먹고 싶다. 스파르타인처럼 굳건하게 삶을 살아내어, 삶이 아닌 것들을 전부 깨부수고, 기다란 낫을 넓게 휘둘러 삶이란 것을 바싹 깎아내고, 삶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구석으로 몰아 더 이상 줄어들 수 없을 만큼 작은 핵심만 남도록.’이라는 대목을 프롤로그에 언급한 것은 저자가 본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모든 부분을 담았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자본주의의 총아인 대도시와 그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이나 경험담을 펼쳐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물론 저자의 삶의 모습들과 그런 방법들이 등장하기는 하나, 결코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나’라는 존재와 ‘나의 삶’이 희미해져 가는 자본주의의 도시 속에서 어떻게 하면 진정한 ‘나’를 찾고, ‘나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 대하여 말한다.

자본주의는 사회적 존재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물건을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경제행위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모토다. 하지만 실제의 방향은 모든 세상사와 인간관계 및 사람과 사물을 자본으로 이해되고 해결될 수 있다는 쪽으로 뻗어나간다. 심지어 인간다움과 삶다움까지도 자본의 영향력으로 이해되고 통용되는 사회가 실상의 자본주의의 세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천민자본주의’로 말하곤 한다. (천민자본주의라는 용어에서 ‘천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계급제도의 폐해를 고려한다면, 천민자본주의보다는 ‘천박한 자본주의’가 더 좋은 표현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결코 ‘자본’과 동떨어져 사회 속에서 이해될 수 없다. 자본주의사회 속에서의 ‘나’는 자본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저자는 그러한 자연스러움으로부터 탈피하여 진정한 ‘나’를 추구하고 찾고 만들어가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나’를 찾아가고 확립하는 과정과 방법이 언뜻 희미해 보인다는 것이다. 짐짓 이러한 숙고의 과정과 결과는 굵고 짙은 선을 갖기 마련인데, 저자는 오히려 ‘나’를 희미하게 만들고 그 방향에 있어서도 개방성을 준다. 그래서 희미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게 이 책의 강점이기도 하다. 자신의 부족함과 모자람 또한 여전히 자기 자신임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동일하게 그러한 타인들과의 부대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삶의 태도가 중요함을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연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희미함’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짙어지는 것은 결국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비교는 자본주의 속에서 고통과 불안, 번잡함으로 귀결된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짙어지고자 하는 ‘나’를 포기하고 기꺼이 희미해진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제야 비로소 타인과의 관계 또한 진정한 자율성과 순수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책의 구석구석은 저자의 이러한 고민과 삶의 실험들로 채워져 있다. 빵을 굽는 일이나 텃밭을 가꾸는 일, 커피를 고민하는 일조차 모두 ‘나다움’과 ‘삶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태도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회피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되려 자본주의를 조절하는 것과 같이 보이게 만든다. 자본주의로 인하여 퇴색되어진 ‘나’를 다시금 찾고, 자본으로 인해 형식화된 관계에 새로운 안목을 갖게 만든다.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에 지치고 뒤쳐진 이들에게 주요한 터닝포인트 또는 대안으로 제시될 만하다고 본다.

박혜윤, ‘숲속의 자본주의자’, 다산초당,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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