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3.9.27 수 13:22
상단여백
HOME 기고/오피니언 특별기고
위 영 사모의 편지은방울꽃 부케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5.24 16:03
  • 호수 585
  • 댓글 0
위 영 (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의 저자)

매달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이 있다. 읽고 온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북클럽. 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머릿속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평소에 사용하지 못하는 현란하거나 고급한 언어를 사용해도 된다. 책 속 주인공들을 빙자해 거침없는 이야기가 오가기도 한다. 누군가 이 세상에서 먼저 사라지면 무덤 앞에서 만나 모임을 하자고 약속했으니 그 돈독함이야 말해 무엇하리.

북클럽 멤버의 아들 결혼식이 있었다. 철강회사 CEO를 지내신 분이니 오죽 사람이 많을까, 그러나 신랑 측에 할당된 사람은 50명으로 소수정예 부대(?)만 참석할 수 있는 결혼식이었다. 아주 가까운 친척들도 제외될 수밖에 없는 자리에 특별하게 초대를 받았으니 이 아니 즐거울쏜가. 밥값이 비싼 곳이라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으나 혼주의 성향을 아는지라 형편에 맞는 부조금을 부담 없이 했다.

식장에 들어서니 옅은 보라색을 주조로 크고 작은 꽃들과 함께 아이보리빛 커다란 아마릴리스가 균형을 이룬 꽃길이 펼쳐진다. 머금은 듯 핀듯한 함박꽃의 은은한 향기가 가득하다. 거기다 그룹의 이름이 적혀 있는 식탁에는 보라색 튤립이 한 묶음 크리스털 병에 꽂혀있고 풍성하게 피어난 흰 난이 목이 가느다란 유리병에 꽂혀 선을 드러내고 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야생화를 무릎 숙여 자주 들여다보는 사람임에도 아름답고 세련된 꽃들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신랑이 입장하는 데 아주 정갈해 보이는 디자인의 은방울꽃 부토니아, 신부의 부케 역시 은방울꽃이다.

사람이 소소해선지 기억도 주제를 벗어난 소소한 것투성이다. 가령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읽었는데 ‘멜랑콜리아’라는 영화가 변증의 소재로 나온다. 현대인의 병이며 다양한 변용을 지닌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가진 행성이 지구와 부딪혀 지구를 소멸시키는 비극적인 SF영화. 우울증을 앓던 주인공은 멜랑콜리아가 다가오자 오히려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조카와 언니를 돌보는 사람이 되어간다. 책을 읽은 지 수년이 지나 기억되는 책의 내용은 부실하기 이를 데 없는데 멜랑콜리아 영화 속 신부가 들었던 은방울꽃 부케만 선명하다. 그보다 더 은방울꽃 부케의 기억이 선명한 이유는 어느 배우가 결혼식 때 들었던 은방울꽃 부케 가격이 천만 원이었다는 신문귀퉁이 기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케가 천만 원?

은방울꽃은 오뉴월에 피어난다. 현대의 여성들이라면 거부할 문장일지도 모르지만. 은방울꽃은 새신부의 모습이다. 작은 종 모양의 꽃은 사랑스럽고 향기로우며 무엇보다 초록잎 아래 다소곳하게 피어난다. 유심한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은일한 자태다.

원래 부케의 시작은 신랑이 신부에게 가져오는 곡물 다발이었다고 한다. 차츰 들에 핀 꽃으로 바뀌어 간 것은 꽃의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신부는 신랑이 가져온 꽃다발에서 한 송이를 답례의 표시로 신랑에게 건네준다. 부토니아의 유래.

은방울꽃 꽃말이 '반드시 행복해진다'라니 신랑·신부가 꼭 들어야 할 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은방울꽃은 애잔하고 아름다운 모습과는 다르게 독초다. 결혼은 생로병사로 이어진 삶속에서 가장 달콤한 시간이지만 결혼의 쓴맛을 기억하라는 뜻일까?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성혼 선언문을 신부의 아버지가 하고 주례사 대신 신랑·신부의 사랑 고백과 미래에 대한 다짐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백 속에 한결같은 당신이라는 신뢰의 표현이 나타났다. 요즈음 세상에 드문 일임이 틀림없는 최장 연애 12년을 했다는 말을 혼주에게서 들었으니 그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신뢰와 한결같은 사랑이 저절로 느껴졌다. 신부 친구 두 사람이 나와서 신랑·신부를 향한 재미있는 편지가 낭독되었다. 무엇보다 백미는 우리를 초대한 신랑 아버지의 권면이었다.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의 자세로 현재를 붙잡아라. 시지프스의 끈기와 뚝심도 필요하다. 좋은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하라. 모험을 피하지 말고 돈키호테 같은 삶을 살라. 결혼 축하한다. 멋진 삶을 살기 바란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밝혀주는 등롱 같던 오월의 꽃들이 하객들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장미와 작약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온 아름다운 오월의 어느 날!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1

기독교헤럴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