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3.11.28 화 05:23
상단여백
HOME 기고/오피니언 특별기고
위 영 사모의 편지謹弔 오에 겐자부로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4.12 15:47
  • 호수 581
  • 댓글 0
위 영 (본지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저자)

선생의 사망 소식을 모로코에서 들었습니다. 장례식을 다 치르고 어느 출판사를 통해 전해진 부음을 북클럽 멤버가 올렸더군요. 향년 88세. 맞습니다. 제가 추앙하는 선생은 요란스러운 장례식 같은 것, 아주 싫어하실 게 틀림없습니다. 가끔 선생의 글에서 비치는 아내와 가족들도 겉보다는 내면을 응시하는 사람들이었지요. 젊은 나이는 아니라 애통할 것까지는……. 하면서도 서늘한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아주 친하게 지내던 오빠가 황망하게 떠난 것처럼 말이죠. 


 먼 나라에 가서 버스를 타거나 걷다가, 아주 열심히 먹거나 가이드를 따라 다니는데 낯선 풍경 속에서 선생이 자주 튀어나왔습니다. 그날 나는 모로코의 아주 오래된 도시 패스, 메디나의 골목길을 걸었습니다. 1200년 전의 도시라니...그 아득한 숫자에 놀라면서요. 나그네가 골목에 들어서 길을 잃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는 수많은 좁고 협착한 길은 저절로 다이달로스의 미로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검은 살빛과 몸이 거의 드러나지 않던 옷을 입은 이들은 이미 오래전 사람들이 아닐까, 이 골목들은 우리네 인생의 길을 보여주는가, 그러다가 선생이 태어나고 자랐던 시코쿠의 숲이 생각나더군요. 선생에게 각인된 시코쿠의 숲은 선생 젊은 시절의 글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에서 다양하게 묘사되지요. 인생의 어두운 숲과 검은 내면의 숲을 은유하면서요.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 히카리가 태어나고 그 아들은 인생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간을 선생에게 열어주었지요. 평생 선생의 손에서 놓지 않았던 글과 책, 그리고 시코쿠의 숲처럼 삶을 읽어가게 하는 ‘사람 책’이었을 것 같아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새소리에 반응을 나타낼 때, 특별한 절대 음감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선생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당황과 혼란 속에서(…) 직관적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히카리(빛)’라고 지었다.” 그리고 선생은 고백합니다. “나의 직관은 옳았다. 그 아이의 존재는 내 의식의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둡고 깊은 곳까지 구석구석 밝혀주었으니 말이다” 외국 여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들 방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글을 쓰고 아들의 침대 맡에서 담요를 덮어주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던 선생의 일면은 사실 어느 글에서든 녹아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따뜻함ㅡ모든 것(가령 천박함 거짓 욕망등)을 꿰뚫듯이 알면서도 놀라울 만큼 따뜻한 시선은 원래 선생에게 내재한 성정이었을까요? 삶을 향한 그리움의 시선? 터득하신 지성이었을까요? 선생은 자신의 글이 소통을 못 하는 아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는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으시지요. 히카리를 키운 경험을 토대로 쓴 ‘개인적 체험’으로 선생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됩니다.


  저녁에 호텔에 돌아와서 오에 히카리가 작곡한 곡을 여러 번 찾아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플륫이 뒤를 잇는 아다지오. 어린 히카리를 바라보는 선생과 아내, 선생이 히카리를 앞에 태우고 자전거를 타는 사진도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찰나의 순간처럼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모든 순간에 아니 거의 모든 시간을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구나. 젊은 아기 아빠는 그때 아기의 삶을, 아니 자신의 삶을 알았을까요? 죽음을 알았을까요? 죽음 뒤의 생, 자신이 사라지고 난 뒤의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도 여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살짝 궁금하기도 했지만, 굳이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신으로라면 더없이 아름답고 위엄 있었을 터, 그러나 이제 알지요. 모든 육체가 꼭 정신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정신이 나름의 존재의식으로 몸을 이끌어가는 듯하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육체의 아집도 강해집니다. 특히 눈은 긴 시간의 독서를 허락하지 않으며 풍경을 보는 일에도 한계를 정해줍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듯 소곤거리는 말을 못 듣게 하며 대신 귀의 소리ㅡ이명ㅡ가 대신하기도 합니다.   


 우리 집에도 선생의 책이 네 권이나 있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도 많지만 여전히 읽지 않은 책도 많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히카리의 음악을 들으며 <책이여, 안녕!>이란 글을 읽었습니다. 선생의 노년이 고스란히 읽히더군요. 죽음 직전에서 살아 돌아온 고기토(선생)는 죽음의 강을 건너버린 사람들과 함께 돌아옵니다. 매우 단순한 설정처럼 여겨지나 깊은 문학성이 고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깊은 문학성은 근사한 자유를 부여해줘서 선생은 과거의 사람들과 거침없는 대화를 하게 되죠. 시시한 성찰 대신 얼마나 멋진 메타포인가요. 자연스럽고 솔직한 노인의 아름다움, 마치 꽃핀 자리의 고아함처럼 시들어가는 육체 대신 정신의 아름다움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글이었습니다. 
 시코쿠 숲은 선생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하겠지요. 
 오에 겐자부로 선생님, 안녕.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

기독교헤럴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