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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목사가 하고 싶은 말(3)목적 지향성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4.05 19:25
  • 호수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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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목사(기성 복된교회)

서울 회의에 참석해야 합니다. 시골 사람 서울 가는 거 만만치 않습니다. 오랜만에 열차를 탑니다. 다행히 KTX나 SRT 열차가 생겨서 왕복 탑승 두 시간입니다. 역마살이 한참 동할 때는 여행 같이 좋은 거 없었지요 만 이제 제법 나이로 삭아 드니 나들이가 고역입니다.

가뜩이나 고속으로 달리는 차 창으로 내다보는 봄꽃 만발한 산야는 다만 엎지른 물감처럼 뿌연 색감일 뿐이어서 다행히 꽃 보고 가슴 저리는 건 면합니다. 그래도 눈길 오래 두면 그 몽환적 봄 풍경에 젖어 들고 말 겁니다. 눈길, 마음에 조심을 섞어 다잡으면 지루할 틈 없이 가벼운 책 한 권은 넉넉히 읽는 시간이지요.

그 풍경에 마음 빼앗기지 않은 덕에 올라갈 때 절반을 읽었습니다. 쏠쏠합니다. 내려올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동행하시는 분이 예약한 건 세 시에 출발하는 차인데 회의에 점심까지 먹고서도 한 시에 일정을 마쳤습니다. 두 시간을 꼬박 기다리는 건 타고 난 성정 상 못 견딥니다. 그것도 복닥거리는 서울 복판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급히 들여다보는 앱(App) 상의 모든 열차는 매진입니다. 급한 성정대로 수서역으로 달려가 창구에 하소연해도 고자세로 위약금 운운일 뿐, 대안이 없습니다. 적으면 1.5배, 많으면 30배 까지 추가 요금을 물어야 된다나요?. 마음 조급해서 그냥 돌아섰지만 그 불친절한 안내가 어처구니없습니다.

두 늙은이가 너른 역 대합실 한 구석 커피숍을 차지하고 앉아 세시를 가늠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2시 차 출발 시간에 맞춰 무작정 플랫폼으로 나갔습니다. 탑승 담당 직원더러 사정을 말하고 무조건 집어 탔습니다. 1.5배로 추가 요금을 예고 받았지요. 빈 자리 아무렇게나 엉덩이 붙이고 여기저기 눈치를 봅니다. 출발 시간 10분 남짓 남았을 때, 번개같이 ‘단거리 매표’ 가 스칩니다. 얼른 앱을 다시 열어 수서에서 제일 가까운 동탄역까지 열차를 검색하니 내가 타고 있는 2시 차 좌석 여유가 충분합니다. 5호 차, 5 A,B석이 벼락같이 예약 됩니다. 순식간입니다. 더러 저같이 성정 급한 분들이 성정 급한 사정 만나면 중요한 해결책이 될 듯 싶습니다. 당당한 내 자리에 앉아서 직원을 불러 사정을 설명하고 익산까지 연장을 요청했습니다. 추가 요금 없이 연장은 되는데 만석이기 때문에 연장 구간의 좌석은 없고 입석이랍니다. 감지덕지하지요. 흔쾌히 지불하고 일단 동탄까지 숨이 가쁘게 내달리니 동탄 역에서 나 앉았던 자리 주인이 멧돼지처럼 나타납니다. 슬쩍 옆의 빈자리로 옮겨 앉습니다. 또 쫓겨나는가 싶어 불안합니다. 책에다 눈을 두어도 글씨만 보일 뿐 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불안합니다. 다행히 다음 역 까지 멧돼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송역에 닿으니 또 불안합니다. 슬쩍 객차 통로로 나가서 어슬렁거립니다. 다음 칸으로 건너가니 다행히 빈 자리는 또 있습니다. 엉거주춤 앉아서 익산까지 미끄러져 내려 왔지요. 그 불안정한 마음으로 책 읽는 건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한 시간 남짓 내 번호 아닌 좌석을 전전하면서 제법 어수선한 시간을 보냅니다. 창밖 아련히 산야에 핀 꽃들에 애절한 마음 들키지 않은 건 다행입니다. 더 다행인 것은 익산, 목적지 까지 과히 멀지 않다는 사실이 우선이구요. 더 강력한 메시지는 아무렇게 가도 내 목적지 익산에 간다는 사실입니다. 더 다행스러운 건 앉아 가든 서서 가든 제 시간에 닿는다는 점입니다. 그 신뢰에 맞춰 2시 9분에 수서역을 출발한 SRT 열차는 3시 18분에 정확한 내 목적지 익산역에 닿았습니다. 플랫폼에 발을 딛는 순간 날아 오를 듯 개운합니다. 에스컬레이터 대신 씩씩하게 계단을 걸어 오릅니다. 불안하게 열차 타고 오던 조바심은 호남평야의 선들바람에 날아갑니다. 까짓거 어떻게 왔으면 뭔 상관이에요. 제 시간에 목적지에 닿았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목적지가 확정되고, 그 목적지를 향한 지향성이 확실한 인생은 거칠 것 없습니다. 좀 서서 가도 무리 없고, 이리저리 쫓겨 앉느라 품위가 좀 달아나도 뭔 상관이래요?

우리 모두 여행 중입니다. 목적지도 확실히 정해졌습니다. 여행의 질은 천차만별이지만 정해진 시간에 우리를 기다리는 종착역에는 어김 없이 닿을 겁니다. 어떻게 살아도 우리의 최종 목적지에 다다를 방향성만 확정 되었다면 한 바탕 어수선한 삶도 견뎌 볼 만한 거 아니겠어요? 인생 여정 중에는 그게 제일 안심 되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영원한 것 같은 인생길이 따지고 보면 SRT 열차로 몇 정거장 스치는 것처럼 그리 긴 시간은 아니거든요. 지금 인생살이가 좀 어수선한 분들께 마음 모아 묻습니다. 모두들 그렇지 않아요?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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