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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18)용서와 두암교회 재건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4.05 15:45
  • 호수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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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은 목사

한국전쟁이 끝난 후 김용은 전도사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야속한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모친과 아들, 친척 스물세 명을 살해한 자들은 바로 이웃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더욱 섬뜩하여 고향에 발길을 끊었다.
가해자의 가족 가운데 조카뻘 되는 사람이 경찰이었는데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쳤다. 그가 인사를 하는데, 김 전도사는 되살아나는 아픈 마음을 미처 추스를 새도 없이 얼떨결에 지나쳤다. 그 경찰관은 어떤 피해의식과 위기감을 느꼈으리라.
김 전도사가 해망동교회에서 저녁예배를 인도하는데 한 낯선 청년이 참석했다. 예배를 마치고 월명산 굴다리를 지나 경찰서 앞에 오자 그 낯선 청년이 다가와서 “저는 경찰입니다. 잠깐만 둘러 갑시다”하고 경찰서로 연행했다. “왜 당신의 이름이 김용일인데 김용은으로 개명을 했소?” 그 점이 수상하다며 고향 연고지인 정읍 경찰서로 압송하겠다는 것이었다.


수갑에 묶여 트럭에 실리는데 때마침 군산 중앙교회 김용섭 장로가 지나다가 깜짝 놀라, “김 전도사님,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고 김용은은 “예, 나는 정읍경찰서까지만 가면 억울하게 죽지 않고 삽니다”라고 대답했다. 김 전도사는 가족 가운데 조카뻘 되는 그 경찰이 김 전도사를 수송 도중에 처형하여 자신의 과거를 은폐시키려는 사악한 간계를 가졌음을 직감했던 것이었다. 그때는 살벌한 전시였기에 후송 도중에 차에서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라 해놓고는 뒤에서 총을 쏘아 처형하는 일이었다. 상부에는 도망치기 때문에 처형했다고 보고하면 그것으로 사건은 덮어지는 것이었다.
사실 김 전도사는 6.25 때에도 공산당이 그를 죄 없이 처형하려고 압송하는 도중에 풀어 줄 터이니 돌아가라고 했던 일이 있었다. 김 전도사는 풀어주는 척하고 돌아서면 뒤에서 총을 쏘아 처형하려고 하는 속셈을 읽고 있었다. 그때 김 전도사는 정식 재판을 요청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럼에도 압송 도중 처형하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따라오는 통에 살아난 경험이 있었다. 
그때 경험으로 김 전도사는 김용섭 장로에게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고 조카뻘 되는 가해자 집안의 간계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또한 전쟁 직후 김 전도사와 박호준 집사의 아들은 정읍 지위대 대장과 임원으로 보복할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해자들을 용서했다. 그러나 김 전도사의 아픈 상흔에 비수가 꽂히는 고통은 계속되었다. 다시 각혈을 토했다. 이러한 번민과 고통을 풀어보려고 기도하던 중 어느 날 로마서 12장을 읽게 되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김 전도사는 그날 그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그들을 완전히 용서할 수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겠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감사했다. 6개월 동안 괴로움에 시달리던 김 전도사는 오랜만에 두 남동생을 데리고 찾아갔다. 가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붙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해주고 화해했다. 동네 사람이었던 가해자들은 공산당원의 지시에 따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만행을 저질렀던 정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다. 김 전도사는 가해자 가족 가운데 홀로된 여인들을 돕기 위해 다비다회를 만들어 50여 년 동안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다. 생일 때마다 축의금을, 별세하면 조의금을 전해줬다. 그것은 순교하신 어머님께서 살아 생전에 노인들을 공경하시던 가르침과 성령의 감동이라고 생각했다.

23인 순교한 옛 두암교회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전정협정으로 끝나고 10여 년이 지났으니 너무도 깊은 정신적, 육체적 상흔을 누구도 싸매어주지 못하였다. 이 깊은 상흔을 덮고 두암교회를 쉽게 재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20대 청년 김태곤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1964년 두암 마을에 주일학교가 시작되면서 두암교회를 재건하게 하셨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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