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목사(기성 두란노교회)의 모친

‘엄마’와 ‘어머니’는 같은 용어이지만 분명 부름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거의 엄마라고 불렀지만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네요. 호칭 하나에도 생각보다 느낌도 다르고 알 수 없는 거리감도 있는 것 같아요. 그야! 어떻게 불리냐는 사람들의 습관이며 집안의 풍습이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확연하게 구분된 시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군 복무 중 어느 날 중대장의 호출에 갑작스럽게 들어갔더니 휴가증을 주면서 그냥 집에 가보라는 것입니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휴가를 보내준다는 것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깜깜한 밤이 되어 언덕 넘어 보이는 집 마당에는 전깃불이 몇 개가 환하게 비치고 사람들의 서성거리는 모습에 역시 예상대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갑작스럽고 매우 황당한 일이 우리 집에서 벌어진 것이지요.

슬픔과 애통보다는 아찔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사실 그 이후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지요. 형님은 형님대로, 나도 역시, 동생들도 물론 변하였겠지만 가장 큰 변화는 어머니입니다. 그동안은 엄마로 살아오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거친 거인으로 그리고 나만의 느낌인 어머니로 확연하고 무섭게 변하신 것입니다. 

제대 후 나를 포함하여 여동생 둘 모두 세 명이 동시에 대학에 다닌 상황에 가난한 집안의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하고 또 일만 하시며 우리 세 명 모두 기필코 학업을 마치게 해 주셨지요. 엄마가 아닌 어머니가 그 일을 해내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실 어머니의 놀라운 정신력을 엿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도 연세가 벌써 92세이군요. 병치레로 아픈 데가 한두 곳이 아니지요. 무릎에, 관절에, 치아에 온몸이 안 아프신 곳이 없으시지요. 사실 연세가 많아지면서 당연히 오는 자연현상 같지만 분명 어머니는 우리 뒷바라지 후유증으로 다 닳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약을 밥 먹듯이 하시면서 이어온 세월이지요.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제가 어머니를 위해 제일 많이 한 심부름이 소재지 약방에서 ‘뇌신’을 사다 준 일로 기억됩니다. 어머니는 일제 말에 소학교를 다니셨지요. 졸업을 앞둔 해에 나라가 해방되었다지요.

어머니는 그날 일본이 망한 것이 그렇게 슬퍼 눈물을 흘리셨다는데 학교에서 일본 선생님이 특별히 예뻐하시어 졸업 후에는 반드시 일본으로 데려가신다고 했는데 희망이 없어졌다며 흘린 눈물을 지금은 가장 어리석은 기억으로 말씀하셨지요. 아마 생각해 보니, “일본군 강제위안부나 일본 공장에 끌어가기 위한 수작이었을 것이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하셨지요.

그러면서도 제일 큰 아쉬움은 공부를 제대로 못 한 것이 안타까움에서 한으로 남으셨는지, 생각보다 교육에 열정을 쏟으셔서 물론 그 덕에 나를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시키는 무리수도 두셨지만…. 모든 어머니의 삶이 대부분 그렇듯이 한때는 남편에게 그러다가 자식들에게 인생을 걸고 부지런히 달려왔지만 정작 당신들의 가슴 속에 박혀있는 한을 누가 대신하여 주겠습니까? 공부한 놈들도, 조금 살만한 자식들도 각자 살기 바쁘고 더구나 자기 자식 낳으면 그 녀석들만 쳐다보면서 정신없이 앞만 달려갈 판에 우리 어머니도 그곳에 그냥 서 계시죠. 요즘 어머니가 목포 여동생과 함께 계시는데 작년 이른 봄에 그 동네 도서관에서 전화가 왔어요.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어머니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일 년 동안 도서 대출 건수가 가장 많은 분을 선정했는데 어머니가 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의아해서 자세하게 물어보니 일 년 동안 무려 150여 권을 대출하여 다 소화하셨다는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묵직한 태백산맥, 혼불, 목민심서, 아리랑, 조선왕조실록…. 올해는 ‘독서 마라톤’이라는 타이틀로 책 읽기를 독려했는데 어머니는 불과 몇 달 만에 약 4천 페이지 이상 달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의아해서 동생에게 물어보니 요즘은 그 좋아하신 TV도 잘 안 보시고 책만 보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좋아하는 드라마도 안 보고 책만 봐요?’ 12시에도 새벽 1시에도 책을 보신다며 ‘드라마가 다 그렇고 그렇지 주말 연속극 하나만 본다!’ 눈이 조금 불편하지 책 읽고 생각하는 것은 그냥 재미있으시다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어머니! 사실 오늘 나도 목포에 내려가려고 계획을 세웠어요. 원래는 어머니 모시고 ‘임자도 섬 여행을 하고자 했는데 계획이 달라졌어요. 작년에 이어 또 도서관에서 올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네요.

어머니는 무슨 상까지 하시지만 제가 보기에는 전혀 싫지 않으신 것 같으며 아니 많이 흐뭇하시고 자랑스러우신 모습이었습니다. 

원래 나이 들면 외롭고 서운한 일만 생각나고 또 생각나는 것이 노인들의 감정이라 잘못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아온 세월에 신세타령하며 죽은 남편도 밉고, 친구에게도 서운하고, 자식 며느리, 흉이나 보면서 불평불만 하는 마음이 많이 드는 시기인데 이런 불편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나타내기보다는 작은 취미를 살려 승화시키는 어머니의 지혜에 깊은 경외심을 느낍니다. 물론 앞으로 살아갈 손자 손녀 증손들에게도 큰 본이 되어 주심에 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행사장은 동네 아파트촌 작은 공간이네요. 상 받는 어린아이 몇 명에 축하객은 엄마 아빠들과 제일 연세 많으신 어머니도 함께 계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부르며 상을 주어도 적은 수에 비록 박수 소리는 작고 빈약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울림으로 다가오며 작은 공간에 터져 나오는 환한 미소들은 잘 꾸며 놓은 화려한 축제장보다 더 싱그럽네요. 오늘 우리 어머니가 받은 상은 비록 초라하고 작지만 그 속에는 어머니의 지나온 삶의 대변이요. 앞으로 사실 날을 응원하는 큰 박수입니다. 어머니 더욱 건강하시고 독서상 수상을 크게 박수하며 축하합니다! 나의 어머니 조연심 권사님 최고입니다!

작은아들 안재홍 목사(전남중앙지방회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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