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3.6.4 일 12:03
상단여백
HOME 기고/오피니언 특별기고
김용은 목사의 생애(16)학살 배경과 두암교회 순교자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3.22 17:00
  • 호수 578
  • 댓글 0
                      김용은 목사

총알이 솜을 뚫지 못한다는 믿음으로 사람들은 초가을에도 두꺼운 솜이불을 내리덮곤 했다. 인기척이 없어야 했다. 그래야 빨치산들이 자기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새벽 4시쯤 됐을까. 밤새 한숨도 잠을 못 이룬 윤임례가 새벽 기도를 위해 예배실 방으로 들어섰다. 제단에 용채가 펼쳐 보곤 했던 성경을 올려놓고 그 제단 앞에 꿇어앉아 낮은 목소리로 기도했다.
그때 문밖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짐, 아짐 계시오.” 떨리는 목소리였으나 이 새벽에 들이닥칠 빨치산들이 아니었으므로 윤임례는 대나무 살로 된 예배당 문고리를 젖혔다. 그리고 마루로 나가 희미하게 보이는 윗마을 한 아재를 발견했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였으나 왼쪽 팔에 피가 묻어 있었다. 윤임례는 직감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구나 싶었다.
그때 싸리문 대나무 울타리 바깥에 바짝 붙어 숨어 있던 빨치산 20여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죽창과 총, 낫으로 무장한 악귀들이었다. 한눈에도 원근의 동네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짐 미안허요,. 참말로 미안허요.”그가 무릎을 꿇어 윤임례에게 말을 하자 빨치산들이 몽둥이로 머리를 후렸다.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마당을 적셨다. 순경 아들을 둔 그 아재는 용은이 숨어 있는 곳을 불면 살려주겠다고 하고 협박하자 예배당 문턱 마룻바닥 아래 땅을 파고 숨어 있다며 거짓말을 한 것이다.


“김용은, 이 반동 새끼, 만약 이놈의 예배당을 뒤져서 악질 전도사 김용은이 안 나오면 알아서 하라우. 읍내 전투에서 우리 동무들이 김용은, 이 간나 새끼 때문에 간부 동무가 죽고, 수십 명이 죽지 않았음 둥.” 그들은 우르르 예배당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방문을 부수며 “이 살쾡이 같은 놈 어디 숨었어!”라고 소리치며 여기저기 죽창으로 쿡쿡 찔렀다. 그 소란에 잠이 깬 용은의 둘째 아들 성곤이 놀라 자지러지게 울었다.
“요 씨가 그 씨구먼.” 하더니 엎어져 있던 아이의 엉덩이 쪽부터 위로 죽창을 찔렀다. 형언하기 어려운 살인이었다. 그들은 또 윤임례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마루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윤임례는 눈앞에 벌어지는 참극에도 자세를 당당히 했다. 방 안의 손자 우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주님께서 데려간 듯했다.
“내 아들 죽이고 손자 죽인 너희들이 또 누구를 죽이지 못하겠느냐. 나 또한 죽어 주님 품으로 간다면 여한이 없다. 나는 너희 형제를 알고, 너희 부모를 알고, 너희 조부모를 안다. 참으로 좋으신 분들이었다. 너희들의 왜 하늘이,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냐? 더 죄짓지 말고 이 피 흘림을 멈춰라. 불로 세례를 받고 이제라도 주님 앞에 나가라. 그리고 너희 죄를 씻어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윤임례는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다. 두암교회를 이끌어온 영수이고 집사이며, 여신도회 회장이고 주일학교 교사이며, 마을의 구휼자이며 상담자이자, 다섯 형제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식과 친인척, 이웃들이 희생되지 않기를 원했다. 윤임례의 말에 흔들린 친정 고창 성내면 머슴 출신 떠꺼머리총각이 눈물을 그러그렁하며 애원했다.
“오메, 어쩐다요. 아짐, 이제부터 교회 안나간다고 한마디만 하시오. 그러면 살려줄 꺼잉게, 자식 새끼들에게도 교회 못 나가게 하겠다고 약조허시오. 그러면 살 수 있구만이라우. 그깟 교회가 뭐다요, 우선 살고 봐야 할 것 이닝이게 벼.” 그러자 북에서 온 인민군이 버럭 화를 냈다. “저 간나 지금 뭐람둥. 남조선 아새끼들 사상학습이 안 되어 뭐라 개 짖는 소릴 함둥.”
그러자 몇몇이 우르르 달려들어 그 떠꺼머리총각을 패기 시작했다. 비명이 새벽을 갈랐으나 동네 사람 아무도 나와 보질 않았다. 보이는 대로 죽이고 닥치는 대로 구타했기 때문이다. 윤임례의 몸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모시 적삼에 피가 흥건했고 봉두난발이었다. 던져지면서 팔이 부러져 뒤틀려 있었다. 찔리고 긁힌 자국이 아침 햇살과 함께 선명히 드러났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노라.”


윤임례는 찬송을 그치지 않았다. 끝 간데없고, 멈추지 말아야 할 주님을 위한 찬송이었다. 빨치산 우두머리가 일본 순사가 쓰던 칼을 빼 들었다.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윤임례의 고개가 푹 꺾였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것 같았다. 입암산 정상에 뜬 해가 빛을 마당으로 쏟아 부었다.
빨치산들이 눈이 부셨는지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말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

기독교헤럴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