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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 (86)해방 이전 한국성결교회의 여성운동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1.18 15:18
  • 호수 573
  • 댓글 1
정상운 박사 ( 본지 논설위원, 전 성결대 총장, 교수 )

부인회의 설립 연대와 전체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1936년 부인회 연합회에 선교비를 보낸 교회는 봉천(서탑, 심양, 북릉)교회를 비롯하여 18교회의 부인회이었다. 신의주 동부성결교회는 부인회 이름을 안나회로 명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한국성결교회는 1920년대에 들어와서 점차적으로 부인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는데, 이것은 장로교회에 비해서는 상당히 뒤진 결과였다.

장로교는 이미 평양이나, 선천, 의주, 양시 지방에서 부인회와 성격과 같은 여전도회가 개교회 별로 1908년 이전에 조직될 뿐만 아니라, 1908년에는 몇 지회씩 연합한 지방연합회가 1년에 4번씩 모여 각 지회별로 활동하였다. 장감에 비해 다소 부진한 점이 없지 않으나, 한국성결교회는 전국 각지의 부인회로 하여금 1934년 4월 27일 성결교회 제2회 총회 시에 부인회 규칙을 총 7장 28조로 제정하였다.

따라서 개교회 부인회가 자기 교회 형편대로 산발적인 목적과 이상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지양하여 하나로 통일함으로 부인회가 성결교회 부흥 발전에 효율적으로 이바지하게 하였다. 부인회 규칙은 회원구성을 의무적으로 개교회 남녀교역자와 여직원 그리고 연령이 15세 이상의 부인신자(학습, 세례교인)로서 신앙이 독실하고 품행 이 방정한 자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임원의 선정은 총회 시에 일반회원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선출하고, 회장위에 일정의 고문격인 관장과 부관장을 두었다. 해당교회 주임교역자가 당연직으로 관장(館長)이 되고, 여교역자가 부관장이 되었다. 부인회의 주요사업은 제6장 '사업'에 나타나는바 첫째는, 일년 2회 전도회 개최, 둘째는 일년 2회 사경회 개최, 셋째는 구제에 주력하는 일이었다. 총회에서 제정한 이러한 사업규칙은 성결교회 전국 각지 부인회에서 실행되었다.

실제로, 함경북도의 라남교회 부인회에서는 부인회 규칙에 따라 1937년 주임교역자의 인도아래 일주일간 사경회를 열고 재림에 대한 성경공부를 하고, 축호전도를 해서 26인의 구도자를 얻는 일이 있었다. 1929년 함흥교회 부인회에서는 총회의 부인회 규칙 제정 이전에 벌써 교회 자급 실시와 성미와 헌금을 모아서 교회 종을 구입하고, 국내외 선교사업과 인근지역 일만 가구에 대한 전도사업을 펼쳤다.

Ⅴ. 부인회(전국)연합회의 조직과 활동
1. 부인회 연합회 조직

교단지인 「활천」 등을 통해 1920년대에는 각 교회에서 부인회의 조직과 활동이 소개되었다. 1930년 초에 이르러 이 일은 전국 각지에 부인회가 조직되는 파급 효과와 함께 그 활동 영역이 점차로 중요시되고, 넓어지자 자연히 교단적으로 그 역량을 극대화하고, 효율적으로 결집하기 위한 중앙조직체의 구성문제가 제기되었다.

1934년 4월 27일 성결교회 제2회 총회시에 전국적으로 부인회 규칙 통일성의 필요를 인정한 이사회의 건의에 따라 부인회 규칙이 통상회에서 통과되었다. 동년 9월 10일에는 경성성서학원 강당을 임시 예배당으로 하여 1913년에 설립된 아현교회에 33명의 발기인이 모여 '부인회(전국)연합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9월 29일부터 30일에 거쳐 경성성서학원 강당에 부인회 대표들이 모여서 창립총회를 개최하므로 역사적인 '성결교회 부인회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창립되던 당시 부인회 전국연합회 회원은 종신회원과 일반회원들로 구분하였다. 종신회원은 일반 회원과 달리 직속 회원비와 기타 기관지대는 내지 않고 20원의 헌금을 회원 가입할 때에 내었다.

그러나 1939년에 가진 5회 총회에서는 종신회원의 범위를 여교역자와 남교역자의 부인까지 확대하였다. 창립총회에서는 백신영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제2회 부인회 전국연합회 총회는 이듬해인 1935년에 열리지 않고 한해 건너서 1936년 3월 19일부터 경성 아현교회당에서 열렸다. 부인회 전국연합회가 1935년에 2차 총회를 갖지 못한 것은 당시 성결교회 총회의 정치적 사건과 연관되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인 목회자의 증가로 인해 종래 선교사 중심의 동양선교회의 교회정치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1933년 제1회 총회 개최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1934년 2차 총회에 이사 선정의 권한을 양도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1935년 3회 총회 때에 소장파 지방 대의원인 변남성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자 동양선교회는 일방적으로 제3회 총회를 무효로 선언하여 교단적인 큰 파문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경성성서학원 여자기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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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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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ㅎ누 2023-05-11 14:12:31

    기사에서 오류가 있습니다.
    <1935년 3회 총회 때에 소장파 지방 대의원인 변남성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자 ~~>라고 되어있는데요. 1935년이 아니라 1936년에 3회 총회 때였습니다. 1935년에는 총회가 개최되지 않았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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