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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85)해방 이전 한국성결교회의 여성운동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1.04 15:19
  • 호수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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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운 박사 ( 본지 논설위원, 전 성결대 총장, 교수 )

처음 시작부터 남녀공학제를 실시함으로 여성사역의 길을 열어놓은 경성성서학원은 1912년 제1회 졸업부터 복음전도관에서 교단으로 변경되기 전 해인 1920년까지 총 졸업생 62명 가운데 여자가 19명을 차지함으로 전체 졸업생 중에 약 30% 비율에 달하였다. 1929년에 이르면 전체 중에 44%에 해당하는 비율을 차지함으로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1921년 교단으로 경화된 이후부터 1929년까지 살펴보면 1923년, 1925년, 1928년, 1929년은 남자보다 많았고, 1924년, 1927년은 그 숫자가 같음으로 그 비율이 남자와 대등함에 이르렀다.성서학원 여자졸업생들은 여성들을 위한 전담 교역자로서 남녀구별의 유교적 전통이 잔존해 있는 당시 상황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함으로 경성성서학원이 세워지기 전 3곳이었던 교회(복음전도관)가 1929년에는 75교회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남녀공학제로 인한 어려움도 있었다. 첫째는 조선 여자들이 구가정(舊家庭) 교육을 받은 것 외에는 다른 교육을 받지 못한 일이 대부분 경우이므로 앞서 말한 남녀 지식의 우열로 인한 가르침의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남녀가 함께 수학하고, 목회 사역을 함으로 이성 간의 문제가 생긴 일이었다. 실제로 1921년 이장하 교수와 최홍은 사감은 이성 간의 불의한 관계로 인해 두 사람 모두 출교되는 일이 나타났다.

또한 1920년 겨울 이명직 목사는 동양선교회 감독 킬보른과 자기 동료 목사들에게 지나간 자기 허물과 실수를 고백하고 영적인 구도 행각을 행했다. 그것은 이명직 목사가 여전도사와 사역을 하던 중에 스캔들에 빠졌던 불미스런 일 때문이었다. 이 일은 남녀의 공동사역을 강조하던 초기 성결교회로부터 남녀의 유별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유교 윤리로 되돌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경성성서학원은 1921년 이 일로 인해 남녀 공학제를 폐지하고 남녀학원으로 분립하였다.

경성 죽첨정에 있는 원래 건물은 여자학원으로 쓰고, 남자학원은 별도로 당시 고양군 아현리의 건물을 신축하여 남자와 여자부를 갑을 양반(甲乙 兩班)으로 나누어 가르치게 되었다. 1927년 입학지원자의 연령이 23세에서 25세로 바뀌고, 입학수속에 있어서도 몇 가지 조목이 개정되었다. 당시에 결정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초기의 모습과는 달리 여성 사역에 큰 관심을 보였던 성결교회의 여성 사역은 제한되어 갔다.

그 한 예로 성서학원의 여성들의 입학 자격에는 남자들과는 달리 가정이 없어야 한다는 조항이 삽입되었다.

IV. 성결교회 여성운동과 부인회 전국연합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 역사와는 달리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성결교회의 여성운동은 개교회(個敎會) 부인회와 전국조직의 연합체인 부인회 전국연합회를 통하여 새로운 양상으로 전환되어 나가고 있다.

1. 부인회 조직과 활동

1921년 종래의 선교중심의 복음전도관 체제에서 목회 본위의 기성교단으로 한국성결교회가 체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개교회마다 양적인 성장으로 인해 과거 복음전도관과 다른 교회내의 목회적 사역의 협력이 요구되자 장감과 같이 자연스럽게 성결교회도 부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한국성결교회의 최초의 부인회는 최석모가 무교동교회 지회인 독립문교회 주임교역자로 파송되어 부인기도회를 인도할 때인 1920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독립문교회는 1917년 9월 무교동교회 집사 한상호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근처에 사는 신자이외에 김선애 자매를 비롯한 행촌동 제사공장(製絲工場)에 다니는 12, 3명이 주일날에 가진 가정기도회에서 비롯되었다. 부인기도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던 제사공장 공녀(工女) 부인회 자매들은 교회당을 매수하여 설립할 때 수리비 50여원의 큰돈을 헌금하기도 하였다.

독립문교회를 필두로 해서 전국 각지에서 규모가 있는 대도시 교회에서부터 점차로 부인회 조직은 확대되었고, 이 일로 인해 개교회마다 부흥이 일어났다. 무교정교회 부인회는 1926년 봄에 우순성, 김몽선 자매의 활동과 한상호, 김정선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구성되었고, 이어서 1929년에는 체부정 교회, 1933년에는 천연정교회, 신의주 동부교회, 1934년에는 봉천교회, 만리현교회, 1935년 아현교회가 각각 부인회가 조직되었다.

초기 무교정(무교동)교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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