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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9)김용은 목사의 생애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2.12.28 16:15
  • 호수 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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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은 목사

■ 신학교 시절의 스승들

김용은 집사는 서울신학교(구 경성신학교)에서 수학하기 위해 서울 서대문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흥남에서 쌓은 사업가적 기질로 학비와 고향교회 유지를 위해 신문지국을 운영했다. 신문 배달 사무실에서 자면서 학비를 모았다. 김 집사는 서른 살이 넘어선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하면서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한 ‘한 손에는 성서를, 한 손에는 신문을’이란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삶을 가르침 삼아 신문지국 운영이라는 지혜를 택했다.

김 집사는 당시 대동신문과 평화신문 지국장이었다. 대동신문 논조는 반공산주의 성격이 강해 흥남 등에서 사업을 할 때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가 복음과 배치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그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용은 목사에게 일평생 영향을 준 스승은 누구일까? 첫째로, 순교하신 어머니 윤임례 집사이다. 김 목사는 일평생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을 머금었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과 아들에 대한 신뢰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겐 주변 어른들과 소외당한 자들에 대한 효심과 긍휼의 마음이 많았다. 김 목사는 이 어머니의 마음을 물려 받아 외로운 자들을 돌보고, 배고픈 자들을 돌보고, 갇힌 자들을 돌보고, 장애인을 돌보고, 섬사람들을 돌보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전신마비 된 공라헬 전도사를 8년 4개월 동안 섬겼다.

둘째로, 장인 박태권 영수이다. 일본에 건너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복강교회를 출석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청년을 좋게 보고 세례를 받도록 안내한 후 막내딸을 맺어주어 결혼시켜주었고 흥남에서 사업 할 수 있는 자금까지 주었다. 장인의 사랑을 잊지 못해 김용은의 처가 식구들이 삼팔선이 갇혀 못 나오고 있을 때 두 차례나 목숨을 걸고 가서 구출하기도 했다. 셋째로,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이다.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은 1945년 12월에 환국했다. 그때 김용은 전도사의 신문지국은 서대문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에서 가까웠다. 김구 선생은 김 전도사의 장인 박태권과 황해도에서 친분이 있었고, 또 김 전도사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흥남에서 사업을 했으며 정읍에서 고아원을 세우고 애국청년운동 한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김구 선생이 정읍에 왔을 때 같이 일할 청년 추천을 김용은 전도사에게 요청했다. 

김 전도사는 고향 친구인 이규석을 추천했다. 이규석은 김구 선생의 비서가 되어 평양에서 김일성과의 회담 때 수행 했으며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후 정계를 떠나 종로 5가의 기독교회관 관리처장으로 일했고 정릉장로교회 원로장로가 되었다. 김 전도사는 이규석 친구가 있는 경교장에 자주 가서 김구 선생이 글을 쓸 때 먹을 갈아 드리며 애국의 교훈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김구 선생과 대화를 하게 됐지요. 김구 선생께서는 젊은 우리들에게 우리 민족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시곤 했어요. 나는 그분에게 반해버렸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김용은 목사는 백범 선생과 관련해 이같이 회고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떠날 때 김 전도사는 경교장에서 환송했다. 그것이 김 전도사가 마지막으로 본 김구 선생의 모습이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은 안두희의 총탄에 숨지고 말았다. 김용은 목사가 1958년부터 1988년까지 30년 동안, 군산시 교회연합회에 구국기도회를 만들어 매월 1회씩 기도회를 이끌고 이후 1972년 1월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들을 초청하여 삼각산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구국 금식기도회를 주선한 것은 김구 선생으로부터 받은 특심한 나라사랑 때문이었다.

넷째로, 서울신학교 학장 이명직 목사이다. 이명직 목사(1890~1973)는 한국 성결신학의 대부로 이명직 목사 장례식 때, 한경직 목사(당시 영락교회 담임)는 조사(弔詞)에서, “성결의 복음을 외치기는 쉬워도 성결의 복음을 삶으로 살아낸 분은 많지 않은데 이명직 목사님은 성결하고 청빈한 삶을 사신 한국교회의 사표(師表)가 되셨다.”고 증언하였다.

김용은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이 목사의 궁핍한 가사를 간간이 도왔고(이명직 목사 사후에 이명직기념사업회의 회장직을 10년 동안 감당하였다.) 무엇보다도 김용은 목사는 사부(師父)인 이명직 목사의 성결하고 청빈한 삶을 본받아 4무(四無)의 삶을 실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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