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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8)김용은 목사의 생애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2.12.14 16:42
  • 호수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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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은 목사

김 집사는 그 아이들이 바로 자신의 유년기 모습과 같아 눈물을 흘렸다. 지독한 가난, 영혼을 파괴하는 굶주림……. 저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배고픔을 면하고, 추위를 피하는 것이다. 김 집사는 제일교회에 고아원 설립을 요청하였다. 최상섭 목사는 어려운 교회 상황에서도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용기를 얻은 김 집사는 적산가옥이 생각났다.

일본 놈들이 떠나며 남긴 그 적산가옥을 쓸 수만 있다면 일단 고아들 수용이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군정 지휘를 받고 있는 군청이나 읍사무소가 이를 허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이때 읍장인 최민철 장로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당회에서 김 집사님이 제안한 애육원 설립 문제를 신중하게 논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로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셨으니 적산가옥을 내줄테니 한 지붕 아래서 먹이고 입히십시오.”라고 말하며 애육원 설립을 위해 거금의 헌금도 했다. 또한 삼남병원 원장 정종실 장로도 매월 헌금으로 도움을 주었다. 이 정읍애육원은 수용 아동들이 많아지면서 시기리에 원사를 짓고 재단법인으로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읍애육원 설립에 산파 역할을 한 김 집사는 1947년 이시문 목사의 추천을 받아 서울의 경성신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애육원 책임자로 사역했다. 모금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시설을 관리했다. 식량이 떨어지면 빚내어 소달구지로 실어다 날랐다. 한국전쟁 중에는 두암마을 형제들 집에 분산시켜 돌보았다.

전쟁 중에 가족이 스물세 명이 학살당하는 중에도 주님의 마음으로 원생들을 돌보았다.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인간 존엄에 대한 문제였고 사랑 부재의 문제였다.

■ 신학교 입학

김용은 집사는 사실상 정읍애육원의 운영을 모두 책임졌고, 소성면 두암에서 가정예배를 이끌었기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이 무렵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쫓겨났던 미국 선교사들이 미군정과 함께 대거 입국해 선교지역을 복구했다. 그 가운데 Joe B. Hopper(조셉 호퍼, 한국명 조요셉. 1921~1991) 선교사가 전주, 군산, 김제, 정읍 등을 순회 목회하며 예수를 전했다. 어느 날 그가 두암마을까지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 보는 미국인에 놀라면서도 너나없이 구경을 나왔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일행과 함께 윤임례의 집을 찾았다. 조요셉은 군산에서 정읍 소성면에 몇몇 신자들이 가정예배를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물어물어 애당리에 온 것이다. 조요셉 선교사가 애당리 가정교회를 다녀간 후 그의 물질적 후원과 윤임례의 큰아들 김용은의 신학교 진학을 계기로 윤임례 집사가 이끌던 두암마을 가정교회는 조직교회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1947년 어느 날, 정읍제일교회 이시문 목사가 김용은 집사를 불렀다. “김 집사, 신학교에 가시지 않겠습니까?” 용은은 너무 놀라 “예?”라고 반문했다. “김 집사가 애육원 사역을 위해 혼자서 뛰어다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두암에 교회가 설립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는 것도요. 내가 기도 가운데 김 집사님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인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키워져야 합니다. 특히 복음으로 미래를 열어야 하는 이 민족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김 집사와 같은 일꾼을 원하십니다. 신학 공부를 하셔서 하나님의 종이 되십시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야 가능한 일 아닙니까?” 김 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시문 목사는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권면했다. “주님께 기도하겠습니다.” 김 집사는 그날 이후 새벽마다 주님을 찾았다.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하옵소서.”

그때 그의 머릿속에 두 분의 얼굴이 그려졌다. 천원제일교회 박영기 장로와 김금주 집사의 대화였다. 박 장로가 김 집사에게 “앞으로 용은 청년은 영적 지도자가 되어 장차 이 나라의 큰 사람이 될거에요.”라고 말했는데 그 짧은 대화가 여러 해 동안 가슴깊이 박혀 있었다. “주님, 주님의 뜻이라면 천 길 낭떠러지라 하더라도 뛰어내리겠습니다.

저 같은 어린 양을 찾기 위해 그 험한 절벽을 타고 오신 주님, 이제 제가 주님 영광을 위해 고난의 길을 가겠습니다.” 김 집사는 기도 응답을 들고 어머니 윤임례 집사를 찾았다. “어려운 일이나 나는 네가 굳은 심지를 가지고 잘 해내리라 믿는다. 중보기도 해주마. 주님께서 늘 지켜주실 것이다.” 김용은 집사는 1947년에 서울 서대문 충정로의 경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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