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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십일월의 숲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2.11.30 15:19
  • 호수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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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영 ( 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 저자 )

숲으로 정착되었지만, 실제 숲은 수풀의 준말이다. 나무 樹와 풀草, 그러나 풀과 나무만 있다면 사실 숲은 숲이 될 수 없다. 햇살도 물도 땅도 그리고 수많은 벌레도 하다못해 공중을 나는 새들도 숲의 근원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신화 속에서 숲은 뮤즈가 사는 곳이다. 신들의 잔치에서 제우스의 딸인 뮤즈가 노래를 하는데 그녀들이 거하는 곳이 바로 숲이다. 혹자는 숲이 음악에 대한 에너지를 주는 곳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숲은 야외라는 어원 foris에서 왔다고 하는데 라틴어 성경에서 보면 foris는 문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문은 다른 세계로의 열림과 만남을 주는 유의미한 곳이다.

숲은 섬세하고 정밀해지는 곳, 정신이 맑아져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잘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존 스토트목사님이 그랬던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두 권의 책을 만드셨는데 한 권은 성경이고 또 한 권은 자연이라고. 내게 있어 숲은 창조주를 가장 선명하고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난한 자가 가장 부요하다는/ 낮은 자가 가장 높다는/사랑하는 자에게 시련을 준다는/이 기이하게도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들이 숲에 들어서면 저절로 체화된다. 특히 십일월의 숲에 서면 더욱 그렇다.

귀주 여행 때 마령하 협곡을 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라는 별호를 지닌 땅 아래 도시였다. 찬연한 은빛 물방울들이 마치 이슬비처럼 내리는, 폭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섬세한 물줄기들이 흩어지는데 물방울이 아니라 마치 ‘빛’의 방울처럼 보였다. 그 아래 식물의 잎들은 거대한 새들의 날개처럼, 세월을 담고 아득한 모습으로 활짝 펼쳐져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아주 색다른 풍경이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지탱해가는 아주 튼튼한 근간은 사물이나 단어 혹은 상황에 대한 열린 시각과 확장이 아닐까, 가령 상처라는 흔한 단어도 마령하 협곡을 지칭하는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 속에 자리하면, 그 상처는 엄청난 협곡의 풍경과 수많은 폭포와 그 폭포 아래서 살아가는 물방울을 담고 있다.

상처가 우리의 살이나 마음속에만 있지 않고 자연 속에 존재한다는 느낌, 식물과 동물,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에게는 상처가 있고 그 상처 때문에 아름답다면,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연단도 마령하 협곡의 상처 같은 게 아닐까, 마령하 협곡의 잔향이 채 가시지 않을 즈음 가이드가 소리쳤다.

“저기 저 벌판에 가느다란 줄 보이시죠? 아 저기 다리도 살짝 보이잖아요. 거기가 바로 마령하 협곡이에요.” 널따란 평지 위에 정말 가느다란 검은 줄이 주욱 그어져 있었다. 협곡 아래서 바라본 공중 위 다리 모습이 선명했다. 그러니 나는 어느 세상을 다녀온 것일까, 겨우 저 아래, 저 평지 아래 조그마한 선 아래 계곡이라니…….

십일월이라선지 그 풍경이 선연히 떠오르며 우리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면, 죽음 후에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다면, 내 영혼이 이사한 후에 저곳을 바라볼 때 그렇겠지. 곧은 형식만 남은 십일월의 숲은 황량하다. 거친 몸통과 날카로워 보이는 가지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그 아래서 바스러지며 흐려지는 낙엽들은 숲에 어두운 잿빛의 그늘을 드리운다.

갓난아기 손가락 같은 사랑스러운 순, 화려한 꽃들과 무성한 잎들의 향연은 누구라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시라면 십일월의 숲은 은유와 응축이 가득한 무겁고 진중한 시다. 그래서 다가오는 시가 아니라 다가서야만 하는 시. 고독이라는 우산이 필요한 시일수도 있다. 십일월의 숲이 주는 시가 난해한 이유는 ‘지금’만 바라보는 시각과 꽃보다 경단이라는 즉물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괄호 같은 부록 같은 본문의 각주 같은 /산과 강에 깊게 쇄골이 드러나는/이재무 십일월 중> 십일월의 숲은 거침이 없다. 선선한 모습으로 잎을 떨구고 뒤돌아서지 않고 성큼성큼 제 갈 길을 간다. 풍경이 주는 놀라운 객관화가 또 하나 가느다란 줄을 내는 십일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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