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 저자)

행운이었다. 신문 기사에는 전부 초대석이었는데 그곳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더니 어머, 가능하단다. 작은 행운에 거창한 이론을 엮는가 싶지만, 안 될 것을 알면서도 하는 행위에 응전이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래서 네 배우의 모놀로그, 그것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들의 연극포럼, <매혹으로서의 연극>을 만났다.

오현경이 36년생 이호재는 41년 박정자는 42년 그리고 손숙은 44년생으로 공식적인 노년이었지만 무대 위의 그들은 청년이었다. 공명을 지닌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 구사, 전달력 확실한 젊은 배우들이었다. 자신이 해왔던 연극 중에서 가장 좋거나 멋졌던 어느 정점을 연기한 후 자신의 연극 인생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평생을 연극 무대에서 살아온 배우가 그 연극무대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연극스러운, 무대 위에서의 자서전이라고나 할까, 이호재는 맥베스를 연기했고 무거움 대신 가벼움을 말했다. 즐겁고 재미나는 연극을 앞으로 더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평생을 진지한 연극이라는 무게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고, 나도 가끔 그러질 않던가.

진중했던 삶이 버거워 가벼운 유머나 즐거움에 혹할 때가 있으니 이 또한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오현경은 이강백의 <봄날>을 연기했는데 시골 동네의 늙은 홀아비가 젊은 여인을 안고 자면 회춘한다는 말을 믿고 아들이 짝사랑하는 동녀를 방에 끌어들인다는....마치 기와집 날렵한 지붕선처럼 사람의 탐욕을 스리슬쩍 보였다가 접는 모습이 가히 일품이었다.

한 사람의 관객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배우의 자존심이라는 노배우의 실존적 언어는 연극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서 지켜내야 할 덕목처럼 여겨졌다. 박정자는 고연옥작 <꿈속에선 다정하였네>중 헤경궁 홍씨를 연기했다. 고아한 시적 표현들이 박정자의 목소리와 기막히게 어울렸다. 힘 있으면서도 아련한 슬픔의 빛깔이 극장 안을 물 들여갔다.

그는 후퇴 피란길을 떠났는데 도착한 곳이 바로 제주 성산포, 한밤중에 배에서 내렸는데 차가운 겨울날 휘영청 밝은 달빛과 맑은 물빛이 세상에 가득했던 그 날을 잊을 수 없다고. 달빛이 너무 영화 같았다고, 제주 피난 시절  크리스마스에 천막 교회에서 춤추고 노래한 무대가 자신의 첫 무대라고....

손숙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의 한 대목은 박완서 소설이 원작이다. 나는 그 소설을 아주 오래전 읽었는데 작가는 실제 청동기처럼 단단한 스물다섯 살 아들을 갑자기 잃게 된 후 그 비통함을 글로 썼다. 나중에 그는 원망할 하나님이 계셔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고백도 했다.

친구 명애는 죽음보다 못한 삶의 현장을 보여주려고 거의 백치가 된 아들을 간호하는 친구에게 병문안을 가자고, 친구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늙은 파파할머니가 된 친구는 아들이 욕창이 날까 봐 마치 공깃돌처럼 그 커다란 아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데....그런 아들이라도 살아 있음에 대한 부러움으로 통곡을 터트린다.

소설의 정점이 손숙의 연기로 무대 위에서 피어나니 눈물이 났다. 수려한 나무의 키처럼 가을이 깊어가는 시절이다. 솟아나는 새 이파리가 우리에게 주는 생명의 덕을 쉬 형용할 수 있으랴만 저물어가는 단풍이 주는 정한 역시 봄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국립극장을 찾아가는 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 편의 가을 에세이였다.

노오란 은행잎들은 글을 빛내주는 아름다운 제목이었고 미묘하게 서로 다른 빛으로 물들어가는 느티나무의 단풍은 차진 문장처럼 여겨졌다. 이르게 진 가지에 이파리 몇을 매달고 있는 벚나무들은 애끓는 절창이 아니런가, 가을의 정서를 담뿍 느낄 수 있는 벗과의 동행도 가을에 가을을 더했다.

벗이여 그대도 느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빚어진 삶의 다양한 편린들이  우리가 실제로 바라봤고 손수 경험했던 부분들이라는 것을, 별의 된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네 삶이란 것을, 그러나 또 무대는 무대라서 우리의 삶을 객관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오, 가을이라서 더욱 그리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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