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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교회 안의 작은교회 선교운동(18)제4장 ‘교회 안 작은 교회’ 역사적 배경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2.09.15 15:41
  • 호수 561
  • 댓글 1
이재완 목사(영암벧엘교회)

  1. 시대적 배경

웨슬리의 모든 가르침과 교리는 성서로부터 나왔다. 그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자연주의, 합리주의, 이신론이 팽배하여 기독교에 침투하였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철학(Philosophy)과 종교(Reli-gion)에 반대하여, 그는 성서적 기독교(Scriptural Christianity)를 외쳤다. 웨슬리는 이성의 역할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성은 계시에 종속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영국에서 일어났던 웨슬리의 복음주의적인 운동은 자연신론과 합리주의에 대항한 반동적인 현상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즉 이에 앞서 일어났던 이기주의에 대항한 감정적 반응이었다. 웨슬리의 설교는 당시에 하나님이 없고 그리스도도 없는 기독교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웨슬리는 당시의 무신사상의 풍토 속에서도 하나님을 제시하였고 그의 가장 활력 있고 철저한 신본주의적 칭의론으로 당시 유행하는 자연주의적 인본주의 종교에 항거하였다. 18세기는 후세 사람들에게 무진장한 역사적 보고로 간주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선조들보다 이 독특한 18세기를 이해하는 데 더 유리한 입장에 있다.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어서 바로 그 이후에 오는 반동적 적대감 없이 냉철한 시각으로 비판할 수 있다. 18세기에 있어서 그 시대의 사회적 특성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면은 대중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분하는 것이다.

좋은 지주 밑에서는 아주 편안해서 종속 상태를 탈피하려는 동기를 잃고, 나쁜 지주 밑에서는 너무 우울하고 억압적이어서 전혀 활기가 없었다. 18세기 공유지 사유화 운동의 압력 하에 자영농 계급이 완전히 사라졌고,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빼앗아 버렸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가난한 계급에 대한 책임을 알고 있는 ‘자비로운 독재자’였지만 상층 계급과 하층 사회를 분리하는 깊은 간격은 남아 있었다. 자선학교에서는 교육의 목표조차 노골적으로 공리주의적이었다.

그 당시의 팜플렛이 묘사한 것처럼 “신발도, 양말도 없어 반은 벌거숭이 거나 혹은 누더기를 걸치고, 욕하며, 흙바닥이나 하수구 같은 곳에서 뒹굴며 부두에서 좀도둑질하는” 빈민층의 아이들을 데려온 것이다.

존 웨슬리가 회심한 1738년 영국의 도덕과 종교는 어떤 기독교 국가에서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패했으나 웨슬리는 이와 같은 도덕적 상황에 대처하여 영국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다.

 

  2. 가정적 배경

웨슬리의 리더십을 이해하려면 그의 가정에서의 신앙훈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웨슬리는 “만일 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라고 언급했고, 그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영향력은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 Wesley)의 목사관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Susanna Wesley)는 ‘감리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웨슬리의 증조부(Bartholomeo Wesley)와 조부(John Wesley)와 외할아버지(Annesley)는 청교도들이었으며,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과 어머니 수산나 역시 청교도적인 배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후에 영국 국교회로 전향하였고 수산나 역시 13세 때에 영국 국교회로 전향했다.

결국 웨슬리는 청교도와 영국 국교회라는 이중적 가정의 배경에서 성장하였다. 이러한 영향이 후에 곧 영국 국교회의 질서와 위엄 그리고 청교도 불굴의 창의성과 금욕주의가 그에게서는 융합되어 나타났다. 어머니 수산나는 그녀의 깊은 신앙심과 고매한 인격 그리고 덕성으로 자녀들을 양육한 훌륭한 가정교사요 종교적 실천가였다.

첫째는 철저한 규칙 준수, 둘째는 통제성, 셋째는 빈틈없는 긴밀성이다. 그녀의 교육은 성서에 기초한 ‘규율’ , ‘습관’ 그리고 ‘복종’을 주제로 정해 놓았다. 어려서부터 자고 먹고 옷을 입는 것 전부를 규칙적인 생활훈련을 통해 교육시켰으며, 말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일어날 때와 잘 때에 주기도문을 외우게 하였다. 수산나는 자녀들이 장성한 후에도 계속하여 지도하고 좋은 ‘상담자’가 되었다.

수산나가 비록 청교도에서 영국 국교회로 전향하였다고 해서 청교도적인 경건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먼저 엄격한 시간표, 하나님 앞에서의 묵상과 자기 성찰을 위한 규칙적인 시간, 영적 일기의 기록, 안식일의 엄수 등 그녀의 생활방법(Methodism)과 청교도적인 유산을 가정생활을 통하여 자녀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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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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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란 2022-09-17 15:59:27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 어머니가 만드는데 훌륭한 사람만 바라고 훌륭한 어머니가 되지 못하니 회개합니다 ㅠ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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