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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 박사의 창문 칼럼(99)기독교 역사적 관점에서의 77주년 ‘8.15 광복절’
  • 최 선 박사(Ph.D., Th.D. D.Min.)
  • 승인 2022.08.12 14:01
  • 호수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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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그들의 숨겨진 헌신과 희생으로 지금의 한국교회와 자유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러운 조국으로 성장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국격을 갖춘 모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77주년 광복절을 맞이합니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지금까지 발전해 왔습니다. 미국에서 20대 젊은 나이에 조선에 발을 디딘 프랭크 월리엄스 선교사와 아내 엘리스 윌리엄스선교사 그리고 그의 아들 조지 윌리엄스를 짧게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던 그들에게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프랭크 윌리엄스(Frank E. C Williams1883-1962) 선교사는 미국 콜로나도 주 뉴윈저에서 태어나 1906년에 덴버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해 부인 엘리스 윌리엄스(1884-1980)와 함께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을 받아 1906년에 인천 제물포항으로 입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문화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자리잡은 제물포에서 아들 조지 윌리엄스(우광복 禹光福, 1907-1994)를 낳았습니다.

프랭크 윌리엄스(우리암, 禹利岩)는 북감리교 충남 지역의 선교 책임자로서 파송을 받아 공주에서 34여 년 이상 교회 개척, 목회, 학교 운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충남 서산, 홍성, 안면도, 천안 그리고 충북 음성지역까지 선교반경을 넓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908년에 그가 인도하는 공주지역과 여주지역 사경회에서 새신자와 많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통회하고 자복하는 회개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의 로버트 샤프(R.A. Sharp, 1872-1906)선교사는 1903년에 프랭크 월리엄스 선교사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샤프 선교사는 공주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중 엘리스(1871-1972)와 결혼하였으나 1906년 장티푸스에 감염이 되어 우리나라에 들어 온지 3년 만에 소천하게 됩니다. 졸지에 과부가 된 샤프 선교사의 부인은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년 후에 다시 공주로 들어왔고 영명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1939년에 추방당했습니다. 엘리스 샤프는 남편과 사이의 자녀는 없었으나 학교에서 형편이 어려운 여아들을 양녀로 입양하여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영명여학교에서 그녀가 돌보던 학생 중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3.1운동을 주동하였던 유관순 열사도 있습니다.

프랭크 월리엄스는 공주 명선학교를 영명학교(공주 영명중고등학교)로 교명을 수정하였습니다. 그는 교육, 선교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과 농업 근대화를 위하여 농업교육에도 헌신하였으며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농업정책을 담당하는 것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조병옥 박사가 있습니다. 영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5-1948년까지 미 군정청 경무국장을 수행하면서 경찰의 인사와 조직을 책임지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34여 년이 넘게 사역을 하는 동안 영명학교에서 교장으로 봉직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을 가르쳤습니다. 1919년 우리나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서울 경기 등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때 프랭크 월리엄스의 교육을 받았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독립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파에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와 다수의 사역자들이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잠시 인도에서 소외된 곳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945년 8.15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자 다시 입국하였고 미군정의 농업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것에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선교사역에 힘쓰다가 우리나라 한국전쟁이 끝나는 1953년에 은퇴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1962년에 천국으로 입성하였습니다.

엘리스 베이트 선교사는 음악을 통하여 한국교회를 위해 교회 성가대, 교회음악 보급에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의 아들 조지 윌리엄스가 미 해군 군의관(소령)으로 하지 장군의 특별보좌역 참모로서 1948년 8.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관료들의 추천을 받은 명단에 그녀의 숨은 역할이 컸습니다. 50명 추천 명단 중에 35명-48명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역사학자 백낙준 박사,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그리고 검찰총장 이인, 대법원장 김용무와 같은 인물들이 사회주의 세력들을 몰아내는 일등 공신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87세의 삶을 살다가 1994년 사명을 다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을 하였으며 공주 영명학교 동산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참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암, 우광복 선교사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습니다. 그들은 공주에서 선교, 목회,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고, 자유대한민국 수립에 지대하게 공헌하였습니다. 대를 이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 주었던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한국선교유적연구회가 행사를 주관하면서 그들의 자손 28명을 우리나라에 초청하였습니다. 자손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활동하였던 선교지를 돌아봅니다. 8월 12일부터 22일까지 공주 제일감리교회와 공주 영명중고등학교 영명학당에서 선교유적 순례와 학술대회, 사진전을 진행합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70년의 고통의 세월이 흐른 뒤에 무덤과 같은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조국으로 귀환하여 통일이스라엘을 건설하였고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해방 후 77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가 되는 그 날을 기대하면서 사랑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소중함을 깨닫고 마른 뼈와 같은 바벨론의 무덤을 열고 나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대한민국 국민, 한국교회 성도들은 질병과 환경과 위기, 전쟁의 위험, 직장과 사업의 혼돈한 삶의 현장의 무덤을 열고 나오는 축복의 날들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최 선 박사(Ph.D., Th.D., D.Min.)

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

삼백만부흥운동본부 대표총재

부천가정사랑학교 대표

서울·포항 FEBC극동방송 칼럼니스트

기독교헤럴드 논설위원

기독교연합신문 집필위원

열린사이버대학교(OCU)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 부천중앙노회 노회장

전(前) 안양대학교 외래교수

전(前) 건신대학원대학교 강사

한국문인협회, 한국작가회의 시인

▲저서: 희망 아름다운 세상, 존낙스의 정치사상,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그대 고마워라, 소중한 만남, 회개와 소망의 시편(나라를 사랑하는 시인모임), 시는 노래가 되어(한국가곡작사가협회), 소중한 그대, 대골 너럭바위, 당신이 던진 한 마디의 말(한국문학방송), 기독교 집단상담,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2018 킹덤북스)외 20권, 전자책 35권 이상

한국문학방송작가회 전자책 출간 작가 315명 중 7위 작가, 가곡: 백두산 천문봉, 섬김 세월 외 15개 이상

유튜브: “세계로부천방송”

최 선 박사(Ph.D., Th.D. D.Min.)  sms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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