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2.10.3 월 22:37
상단여백
HOME 기고/오피니언 특별기고
코메니우스와 21세기 기독교 교육의 방향과 과제(1)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2.07.14 18:26
  • 호수 556
  • 댓글 0
정일웅 교수(현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본 글은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설립 22주년 기념 강좌에서 정일웅 교수(전 총신대학교 총장)가 발표한 강연이다.     

서언

오늘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설립 22주년을 맞는 기쁜 날,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축하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강연주제는 ”코메니우스와 21세기 기독교 교육의 방향과 과제“에 관한 것입니다. 제목이 좀 거창해 보이지요? 그러나 강연 요지는 코메니우스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간략한 인물소개와 그가 남긴 교육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되새겨보면서, 앞으로 코메니우스 연구소가 이곳 ‘히스토리 캠퍼스’에서 어떤 일들로 한국교회를 섬기며 활동하게 될지를 간략하게 소개하려 합니다.

1. 코메니우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먼저 그의 인물됨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17세기 유럽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며,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 한지 약 100년 먼저, 지난 15세기 초엽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J.Hus,1369-1415)의 개혁 정신을 가장 잘 따랐던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의 목사요, 후에 그 교회의 3번째 감독이 되기도 했었던 인물이다. 그는 1592년 동유럽의 작은 나라, 보헤미아의 모라비아지역에서 탄생하였다. 오늘날 체코공화국이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은 고아로써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내다가, 16세의 늦은 나이에 형제연합교회의 라틴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나 형제연합교회는 총명한 코메니우스를 일찍 지도자감으로 주목하여, 그 당시 칼빈주의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던 독일 헤어보른과 하이델베르그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학업을 마친 후(1614), 그는 모교에 돌아와 라틴어 교사가 되었고, 1616년 결혼 후, 곧 목사로 안수받고,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1618년 풀넥의 작은 도시에 있는 형제연합교회의 목사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해가 남성 1/3이 희생당한 유럽의 비극적인 30년 종교전쟁이 시작된 해였다. 가톨릭 편에 있던 황제 페르디난트는 프로테스탄트 편에 서 있는 코메니우스와 지도자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렸고, 그 일로 잠시 코메니우스는 은둔생활에 머물렀으나, 1627년 황제는 또다시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종명령을 내려, 그는 더이상 고국에서 살지 못하고 따르는 형제연합교회의 성도들(천여명)과 함께 망명길을 떠난다(폴란드 리싸).

그러나 망명 생활에서 코메니우스는 기독교적인 학문의 깊은 연구로 인간교육과 관계된 여러 권의 책들을 출판하여 유명인사가 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어머니학교의 소식’, ‘보헤미아의 교수학’, ‘열려진 언어의 문’, ‘자연과학 개론’, ‘대교수학’, ‘세계도해’ 등이었다. 특히 ‘열려진 언어의 문’은 유럽 여러 나라말로 번역된 유명한 책이 되었다. 그 이유는 언어를 쉽게 배우는 원리를 그 책이 잘 밝혀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오늘날까지 언어학자로, 또한 현대 교육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1648년 30년 종교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에서 루터파와 칼빈파는 프로테스탄트교회로 인정받았으나, 안타깝게도 형제연합교회는 인정받지 못해, 코메니우스는 목사직과 감독직을 내려놓고 교회를 해산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한다. 그리고 첫 망명지였던 폴란드 라사 마저 전쟁에 휩쓸려, 도시가 불타면서 코메니우스의 집과 도서들이 거의 소실된다. 겨우 가족과 함께 몸을 피한 코메니우스는 1657년 마지막 망명지 암스테르담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14년을 더 살다가 1670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은 지금도 암스테르담 근교 나르덴에 있는 프랑스 개혁교회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돌아보면, 코메니우스는 그 당대(1640)에 벌써 교육철학자로 유럽에서 이름나 있었다. 그 이유는 1637년에 발표한 “범지혜의 선구자”(Prodromus pansophiae)란 논문 때문이었는데, 이 글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지혜를 가르치는 범지혜(Pansophia)의 교육을 제창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감동된 유럽 여러 나라는 코메니우스를 데려다가 범지혜학교와 범지혜대학을 세우려 했다(프랑스, 영국, 미국, 스웨덴, 화란). 그때 미국에 하바드 대학이 설립되어(1637-38), 그를 초대총장으로 초청했으나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역시 망명 생활에서도 계속해서 많은 연구를 통하여 여러 문서를 남기게 되는데, 전 생애 동안 약 250여 종을 출판했으며, 그 가운데서 오늘까지 발견된 것이 약 200여 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럽의 기독교 역사는 이처럼 유명했던 교육철학자요, 교육신학자인 코메니우스를 곧 점점 잊어버리게 된다. 물론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그의 교육적인 문서들에 담겨 있는 교육체계와 학교교육이론, 교재론, 교수 방법론 등을 확인하고 코메니우스를 “교육학”의 아버지로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는 코메니우스를 단지 교육학자로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 그가 그토록 중히 여겼던 신학과 특히 신 중심적인 인식론은 계몽주의적 영향으로 이성 중심의 인식론에 밀려 거의 학문 세계에서 배제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문서들은 그런 방향에서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생각하면 코메니우스는 데가르트와 함께 17세기 유럽의 시대 전환의 분기점에 서 있던 역사적 인물이었다. 오늘날 역사연구는 근세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가르트는 17세기에 떠오르는 태양이며, 코메니우스는 석양에 지는 해로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아이러니하게 코메니우스가 죽은 지, 265년이 지난 1935년(20세기 중엽), 그가 남겼다는 소문만 떠돌던 7권의 “세계개혁의 제언서”원고가 발견된다. 라틴어 원본의 제목은 “인간적인 일들의 관계개선에 대한 보편적인 제언”이었다. 이 대작의 발견으로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코메니우스의 학문은 새롭게 평가되어 주목받는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1966년 국제 코메니우스 학회가 설립되면서, 이 문서들은 체코와 동서독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었고, 코메니우스는 17세기의 교육학자요, 철학자요, 신학자로서의 3가지 명예를 새롭게 얻게 되었다. 

7권에 담긴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1648년 30년 종교전쟁이 끝났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 코메니우스는 여전히 망명 생활에 처해 있으면서(화란),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는 유럽 사회의 학문과 정치와 교회의 문제들을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유럽 사회가 다시 하나의 공동체가 되게 해야 할지를 꿈꾸게 됩니다. <다음호에 계속>

기독교헤럴드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

기독교헤럴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