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 (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오란비 시간이다.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듣다가 벌떡 집을 나섰다. 걸어야지, 이른 새벽 사람 없는 길을, 이 거침없이 내리는 빗속을, 언제나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하는 나무. 나무처럼 비를 맞아야지. 나무처럼 팔을 벌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내 몸속에 가득히 담아야지. 그늘을 드리워서 사람들을 쉬게 하고 깊고 무성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녹음유초승화시綠陰幽草勝花時 왕안석의 시가 생각나는 즈음이다. 우리말 찔레꽃 머리도 여름을 의미하지만, 초하 쪽으로 기울어 있다면 녹음유초승화시는 좀 더 깊어진 여름이다. 성숙할 대로 성숙한 나무의 그늘은 깊고 서늘하다. 나무 그늘 아래 그윽한 풀들 역시 수많은 사유의 길처럼 무수한 초록의 결들을 보여준다. 勝花時, 꽃피는 시절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햇살 찬연한 시간에도 아름답지만 비의 鬱이 살짝 드리운 오늘 숲 그늘은 더없이 그윽하다.

작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베트남 시골 논둑에 스크린을 펼치고 유명한 명화들을 보여주는 비디오 아트가 있었다. 무성한 풀밭 위에 앉아서 자신들의 언어로 그림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짐작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베트남의 자연 풍경과 명화, 순박한 농부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그 모두를 함께 보는 나. 아, 날카로운 생의 한 단면이 아닌가.

 오란비 시간에 장화와 비옷을 챙겨 집을 벗어나 숲길을 걷는 것 역시 젊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산 위에 내리는 빗방울 소리, 길섶 풀들 위에, 머리 위 나뭇잎 위에 내리는 빗방울 소리를 구별해서 들어본다. 두 개를 섞어 보기도 하고 세 개를 무심히 함께 듣기도 한다. 사람 없는 산책길에 참새가 어느 때보다 많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작은 참새는 조금도 쉬지 않고 통통통 걷고 뛰며 아침을 찾는다. 그러다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선지 멀리 가버린다. 비가 세차게 내려서 흙이나 풀을 씻어내서 여기저기 검은 열매들이 잘 보인다.

작년에 떨어졌던 도토리를 여러 번 부리로 찍어대는 참새. 물에 젖어도 껍질이 열리지 않는지 결국 방향을 바꿔 걸어간다. 가느다란 어린 가지보다 더 여린 다리로 쉬지 않고 걷는다. 그나마 나무 아래가 비에 덜 젖을 것이다. 그래서 나무 아래를 저렇게 돌아다니는 것이겠지. 참새가 길 위에서 자그마한 지렁이를 발견했다. 지렁이를 입에 물고 얼른 풀숲으로 들어선다. 한 번에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려놨다가 다시 물고를 여러 번 반복한다.

 물론 편안한 식사 자리는 아니다. (하긴 나의 편안과 저들의 편안은 다를 것이다) 계속 움직이면서 지렁이를 먹는다. 다 먹었는지 그제야 나무 위로 살짝 날아오른다. 맛있는 밥이었을 것이다. 지렁이야 촉촉한 비가 오시니 즐거운 나들이를 슬슬 나왔겠지만 그 나들이가 주검의 시간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 모든 삶의 다름 속에, 아니 오히려 그 다름 때문에 공평한 것이다. 소유의 차이로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탄식하지만 누리는 것은 소유의 차이가 아니다. 이런 숲의 시간도 소유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소유도 높은 담이 될 확률이 있어 그 소유 때문에 숲을 즐기지 못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젊음의 시절  젊음에 빠져 자연을 바라보지 못했다. 젊음이 사라지는 회한 사이로 자연이 스며들었다. 

 걸어온 시간은 사라져버리고 걸어가야 할 시간은 서늘하기만 할까, , 어느 시인은 ‘인생은 한 편의 연극 누군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을까’ 탄식했지만 나는 오란비 시간, 이 아침에 생각한다. 생이라는 연극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다 주인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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