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본지 논설위원' ,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일흔세 살에 이르러 겨우 금수충어禽獸蟲魚의 골격 초목의 출생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본의 유명한 화가 호쿠사이의 말이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각지고 날카로운 겹눈으로 사물을 관찰하며 그려온 화가가 일흔세 살에서야 동물의 골격이나 초목의 출생을 깨달았다고 하니 우리 같은 범인이야 어디 초목의 ㅊ이라도 알겠는가.
친정집 뜨락에는 아주 커다란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해마다 엄마에게 엄청난 양의 열매를 안겨주는 다산형의 나무였다. 은행나무를 수형이 아름다운 나무라고 하지만 그 나무는 암나무라선지 가지만 주욱죽 벌어져 소박한 시골집 텃밭에나 어울리는 평범한 나무였다. 바람이 좀 세찬 날이었다. 엄마가 문득 그러셨다. “아야, 저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믄 살째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야, 비 오고 바람 겁나게 부는 날 가만히 혼자 앉아 있으믄 저것이 머리 산발하고 달라들 것 같단 말이다. 으짜다가 집 쪽으로 무너지믄 집도 나도 죽겠구나 싶고....”
강화도 고려궁지 옆 관청리에 700여 년 된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다. 주위에 옹기종기 서 있는 집들의 지붕조차 한껏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다. 오백여 년 가지고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은행나무의 장구한 수명이 켜켜이 아로새겨져 있는 나무이다. 처음 보는 순간 ‘귀기’를 느꼈다. 사람으로 친다면 무한 권력을 지니기 위해 자식도 남편과 손자조차도 거침없이 해하던 늙고 노회한 측천무후 같다고나 할까, 나무라고 하여 무조건 순후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한 나무.
포천 국립수목원을 가면 사람들 별로 다니지 않는 산책로를 찾아 걷는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관목원을 지나게 되고 두툼한 몸통의 커다란 은행나무들과 만나게 된다. 은행나무들을 자세히 보면 나무 몸통 사이로 두툼한 혹 같은 돌기가 여기저기 솟아나 있다. 이름하여 유주乳柱 ㅡ한자 풀이대로 한다면 젖기둥이란 뜻이다. 돌기 부분에 솟아나는 나뭇잎이 있다며 줄기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뿌리가 기형적으로 변한 것, 어느 학자는 은행나무의 비상식량이라고 했다.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부르는 은행나무는 자신이 지닌 독성으로 인하여 벌레가 없는 나무이다. 빙하시대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있는 나무, 불이 나도 잘 타지 않는다. 성장은 더뎌서 할아버지가 심으면 손자 대에서나 열매가 열린다는 공손수라는 별호를 지닌 느리고 침착한 나무, 그가 만들어 낸 유주는 결국 살아남기 위한 발상의 전환일 것이다. 무서운 창의력이 아닌가.
강화도 외포리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볼음도의 은행나무는 내 생의 나무였다. 멀리서 바라보는데 나무가 움직였다. 대단한 위용. 식물의 넘치는 기가 공기에 실려 손으로 만져질 듯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연극배우의 과장된 얼굴처럼 풍부해지는 표정이라니, 감탄하는 나를 오히려 나무가 바라보는 듯했다. 주객이 전도된 괴이한 느낌. '이 나무는 수놈이요.....여길 보시오...여길....딱 거시기가 있잖소.' 유주가 그곳에서는 거시기였다. 낯선 사람들에게 터놓고 거시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할아버지의 재미가 팽배한 얼굴이 오히려 재미났다. 은행나무 안에 살던 뱀 이야기가 이어지고.
오월 하순의 숲은 참으로 눈부시다. 고광나무 향기가 바람 속을 걸어 다가온다. 속은 비어있지만, 초하의 신부처럼 화려하게 성장한 빈도리 꽃은 무성하다. 눈앞과 땅만 바라보며 살다가 숲으로 가면 저절로 하늘을 보게 된다. 햇살을 향한 고달픈 짝사랑이 빚어낸 불균형한 가지를 보며 인내를 배우고 새로운 형제를 위해 부러져 나간 자국을 보며 희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그러나 여전히 청년처럼 싱싱한 나무들, 휘면서도 곧고 곧으면서도 자유롭게 하늘을 향해 전진하는 우듬지들……. 숲에 앉아있으면 오랜 시간의 향기가 파동 치듯 느껴져 온다. 시들고 늙은 나무들은 모두 부활해서 새로운 정점을 향하여 달려간다. 어찌 새로운 부활을 꿈꾸지 않을 수 있으랴,
오월이 가고 있다. 이제 ‘찔레꽃 머리’의 시간이다.
봄/그녀/연두색 슬리퍼 신고 뒷짐 진 채/이웃집 마실 오듯 고개 슬쩍 들이밀더니/어느새 사립문 열고 잰걸음 걷는다/성큼 거리는 걸음/ 떠남에 대해 여한 없는 모습/바라보는 나만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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