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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 박사의 창문 칼럼(91)안중근 의사의 나라와 민족 사랑
  • 최 선 박사
  • 승인 2022.05.22 23:47
  • 호수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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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지리학적으로 중국, 러시아,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 등 강대국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19세기 말 강국들은 약소국들을 식민지화 하려 하였고 조선도 그들의 레이더에 포착이 되었습니다. 제국들에 의해 통상조약 압력 등으로 매우 혼란했던 당시 우리나라는 개방해야 하는 기회였는데 친일, 친러, 친미, 친청의 정치 세력들이 미래를 위한 균형 잡힌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강대국들에게 굴복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바로 그 혼란의 중심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조선 황해도 해주 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특정 세력에 의해 모함받고 서울을 떠나는 부친을 따라 여러 곳으로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부친의 애국정신의 영향을 크게 받아 어릴 때부터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는 뜻을 키웠습니다. 안중근은 청년 시절에 서양의 발달된 문화와 접촉을 하면서 계몽 교육으로 이 나라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을 기점으로 식민지 침략을 향한 고삐를 더욱 조여 매고 있었습니다. 초대 대한제국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정미년에 조약을 맺자 곧바로 황제를 폐하고 조선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바로 그 무렵에 안중근은 가족들과 눈물로 이별하고 북간도로 들어가 부당한 것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대대적인 의거를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강인한 신체를 키우기 위해 정기적으로 운동하였으며 용정에 온 안중근은 명동에 자리를 잡고 전문적인 무예를 익혔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은 여기서도 의병 양성이 어렵게 되자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조심스럽게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반일 의병장 이범윤을 만나 그와 함께 창의회 이름으로 군자금 30만 원과 수많은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추지방에서 1908년부터 군사훈련을 하는 한편 조선군내진공전투를 진행하였습니다. 안중근은 의병대장 전제덕 부대의 우군령장을 맡고 경홍의 고간원과 회령의 신간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대적으로 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해 7월의 신간원 전투에서 큰 손실을 보아 부대는 흔적도 남김없이 궤멸되었습니다. 그래도 의지를 꺾지 않은 안중근은 1909년 봄에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 5적을 처단키로 굳게 맹세했습니다. 7인 단지동맹을 맺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서 다짐하기를 조선 독립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일찍 중국 하얼빈역 대합실에서 긴장한 마음을 달래가며 대기하고 있던 우덕순이 거사를 위한 기회를 놓치자 자기 외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사람이 없음을 실감한 안중근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민족을 구하는 거사를 실행하기 위해 신한촌에서 땀 흘려 준비한 일이라든지 손가락을 자르며 맹세하던 굳은 의지들이 그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오래전부터 사진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기억한 안중근은 오전 9시에 조심스럽게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정확하게 맞은 총소리가 하얼빈역에 강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은 태연하게 자신의 품속에서 간직했던 태극기를 펼쳐 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습니다. 안중근은 일본 로씨야 헌병에게 체포되어 일본 사령관에 인계되었고 여순 감옥에 감금되어 말할 수 없는 갖은 악형과 심문을 받았습니다.

강력하게 전개되었던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한반도 조선 방방곡곡은 물론 지구촌 세계로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1910년 4월 16일자 영국의 한 신문에서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단연코 안중근이라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민족을 살리려는 영웅의 월계관을 거머쥔 채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습니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략했다고 보도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중화민국을 창립한 존중산은 “안중근의 공적이 삼한과 만국을 돕고 백세와 춘추에 빛나리라”고 했으며 1931년에 일본에서도 ‘안중근 의사’란 연극 공연이 시민들에게 공개될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 있었습니다. 전 흑룡강성의 장수 천레이는 “안중근은 내 맘속에 애국 열정의 불을 지펴주었다. 내가 항일 혁명 투쟁에 나선 계기는 안중근을 숭배하고 따라 배우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모진 고통을 겪던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에 조선독립을 기도하며 조용히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가져다 안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꽃다운 32세의 젊은 나이로 우리나라가 외세에 의하여 국권이 시들어가는 중심에 서서 민족독립의 성스러운 싸움에 귀중한 생명을 고국에 바쳤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애국정신과 그가 일본군과 투쟁하며 목숨을 다해 희생한 고귀한 나라 사랑을 후손들은 배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 세기가 다가올 정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아직도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산가족은 물론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수많은 백성들의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확신합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복음으로 통일이 되는 그날에 한민족의 동포들이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며 예수 한국, 선교 강국으로 힘을 길러 민족복음화와 세계복음화를 이루는 중심에 서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통일기도를 하면서 그 꿈이 한 걸음 더 가까이 왔음을 반드시 기억하고 오늘과 내일도 나라와 민족을 향하여 일조하면서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유민주주의 평화통일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으며 애국애족의 정신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국민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최 선 박사(Ph.D., Th.D., D.Min.)

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

서울·포항 FEBC극동방송 칼럼니스트

기독교헤럴드 논설위원

기독교연합신문 집필위원

OCU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부천중앙노회 노회장

전(前) 안양대학교 외래교수

전(前) 건신대학원대학교 강사

한국문인협회, 한국작가회의 시인

▲저서: 희망 아름다운 세상, 존낙스의 정치사상,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그대 고마워라, 소중한 만남, 회개와 소망의 시편(나라를 사랑하는 시인모임), 시는 노래가 되어(한국가곡작사가협회), 소중한 그대, 대골 너럭바위, 당신이 던진 한 마디의 말(한국문학방송), 기독교 집단상담,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2018 킹덤북스)외 20권, 전자책 30권 이상

한국문학방송작가회 전자책 출간 작가 315명 중 7위 작가, 가곡: 백두산 천문봉, 섬김 세월 외 15개 이상, 유튜브: “세계로부천방송”

최 선 박사  sms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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