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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초의 전킨선교사 (31)전킨 선교사를 회상하며1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2.04.14 13:52
  • 호수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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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 선교사  (1865년 12월 13일-1908년 1월 2일)

어느 사람도 다치지는 않았지만, 전킨의 하얀 여름옷과 모자는 설교 강단에 서기에 적합하지 않게 더럽혀졌고, 어린 소년은 마음이 상하여 다시는 전 목사와 함께 당나귀를 타지 않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전킨은 예배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가서 예배를 인도할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였습니다. 그는 전자를 선택했고, 어느 마음씨 좋은 여인이 자신 남편의 흰 두루마기와 헐렁한 한복 바지를 제공했지만, 양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신발이나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가 설교하는 동안 마음씨 좋은 부인은 근처 냇가에서 전킨의 옷을 빨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함으로 본인의 남편이나 전킨 선교사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인지 아닌지는 여러분이 판단할 것입니다.
전킨은 1907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장티푸스 폐렴에 걸렸습니다. 그의 고통은 처음부터 매우 컸으며, 세 명의 의사와 숙련된 간호사가 질병의 진행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가 하였던 일들에 대해서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고, 한국인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는 주위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는다는 것이 좋은 것이요”라고 말한 다음에 “나는...지금...갑니다. 너무...행복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1908년 1월 2일에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었으며, 군산 선교부에서 세 명의 어린 아들과 함께 랭킨 박사의 무덤 인근에 안장하였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예전에 한 선교사가 천국으로 가면서 했던 말에 본인의 마음을 담아 남겼습니다. “절대로 내 일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미국에서 3년 동안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의 두 장로가 전킨을 기억하는 기념비를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의미는 간단하지만, 그의 무덤 위에 기념비가 놓였음을 발견하고, 전킨 선교사의 이름이 새겨진 교회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 이후 몇 년 동안, 주일마다 전킨 선교사의 이름으로 정겨운 종소리가 울려, 사람들이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이 땅이 더 이상 이방인의 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메리 모어랜드 전킨에 대한 단상
오빠, 에드워드
토야의 조상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그리고 장로교인)이었고, 그녀의 할아버지 조지 전킨(George Junkin)은 워싱턴 대학에 재학 중에 남부 동맹군을 지지하여 한동안 스톤웰 잭슨 장군 밑에서 있던 젊은 장교였습니다. 나중에 할아버지 조지가 판사가 되어 버지니아주 크리스천 버그에 살았습니다. 그가 직책에서 은퇴했을 때 그의 동료들이 그에게 손잡이가 금으로 된 지팡이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전킨 판사의 장남이며 토야의 아버지인 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은 워싱턴 앤 리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렉싱턴에 사는 레이번과 사랑에 빠졌고 유니온신학교에 다녔고, 목사 안수받았고 메어리 레이번과 결혼하여, 1892년 여름, 남장로교회의 파송 받은 다른 다섯 분과 함께 한국 선교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토야의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로부터 지금은 마우리(Maury)강 북쪽 옆에 큰 농장과 방앗간을 물려받았으며 건축과 설계를 하는 사업가로 있습니다. 렉싱턴에 있는 석조 성공회당을 설계하고 건축하였습니다. 프레데릭스버그에 있는 장로교회 석조 예배당도 건축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재봉틀 부착물을 발명하였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둘째 딸 토야의 어머니인 메리인 크레용 크림이나 수채화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는 궁멀 우리 방 중 하나의 벽에 있던 세 마리 여우 머리의 크레용 그림을 기억합니다. 토야는 아마도 어머니로부터 예술적인 감각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토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처음으로 서울의 기와집을 빌려 살면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조지가 18개월에 사망한 후 제가 태어났습니다. 한국어는 미국인들에게 매우 어려운 언어입니다. 언어 표현의 방법과 형태가 영어와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사는 동안 끔찍한 아시아 콜레라 전염병이 발생하여 수천 명이 죽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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