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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초의 전킨선교사 (30)전킨 선교사를 회상하며1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2.04.06 18:06
  • 호수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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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의 선교를 회상하며

전킨 선교사(1865년 12월 13일-1908년 1월 2일)


아내, 메리 전킨 (Mary L. Junkin)1892년 내쉬빌에서 해외 선교 사업 자원봉사자 회의가 열렸는데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University Theological Seminary)에 다니는 W.D. 레이놀즈와 케먼 존스턴(Kerman Johnstos)이 참석하였습니다. 전킨(Wm. M. Junkin)은 이 두 학생의 동급생 친구로 이들이 듣고 돌아와 들려준 언더우드 박사의 한국에 대한 호소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워싱턴 앤 리대학교의 학생이었던 전킨의 영혼에는 이미 선교의 정신이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포맨(Forman)과 와일더(Wilder)가 학생 자원봉사 운동(SVM)을 위해 여러 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선교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감동에 젖어있었던 터였습니다. 당시 우리의 남부 장로교 교회는 이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어 정당성을 느끼지 못했고, 타자기 회사 책임자인 언더우드 박사의 형제가 기업에 2천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제안했을 때까지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자원봉사자들의 열정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전킨은 1865년 12월 15일 버지니아 크리스천 버그에서 조지 전킨 판사와 베티 몬테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892년 11월 4일 서울에 도착한 일곱 명의 선교사들의 선교 개척단을 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불행히도 동학 혁명과 중일 전쟁으로 도착 후 3년 동안 서울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장로교 협의회는 한국에서 일하는 모든 장로교 단체로 구성되었으며, 전킨은 1894년에 서기 및 1895년에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한반도의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를 권고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으로 여행하였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전킨은 서소문 밖에 있는 개인 주택을 개인 자금으로 사들여 가족과 함께 이사하였고 드루 의사와 함께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의료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드루 의사와 전킨은 한 작은 범선으로 가족을 옮겨와 군산 선교부를 개설하였습니다. 그 집은 밀물 썰물이 오가는 인근지역에 있는 작은 초가집으로 그곳에서 4년간 살았습니다. 전킨은 드루박사와 함께 군산의 섬들, 시골 마을들을 순회하면서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 설교하였습니다.
1904년에 힘에 부쳐 건강에 위기가 왔습니다. 소년 학교를 책임지고 학교 건물을 짓고 선교 훈련 수업하고, 평양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특히 순회 전도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선교지를 전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선교 활동을 전주교회 반경 6마일로 제한하였습니다.
그가 그의 선교지를 옮기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선교 지역의 사람들이 군산으로 몰려와 그가 떠나는 것에 항의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목사님을 지키기 위해 서울과 미국으로 전보를 보내려 하였습니다.
전주에서는 많은 어려움과 낙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로 우리의 가장 큰 교회 건물을 세웠고 인근지역 열두 곳에서 예배 모임 장소를 세웠습니다. 레이놀즈 박사는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는 부지런하게 성서 연구했고, 충실한 준비로 주민들에게 알기 쉽게 설교했습니다.”
그는 길에서, 여관에서, 증기선이나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수천 명의 사람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15년 이상의 선교사 생활하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떤 때는 많은 위험에 처해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는 해안가에서 배가 거의 난파되는 것을 여러번 경험하였고, 폭우로 물이 넘치는 개울을 건너면서 미끄러져서 빠진 것을 한 한국인이 발견하여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895년 간호사와 함께 콜레라에 걸린 사람들의 집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장마철 어느 안식일 아침에 그는 집에서 16마일 떨어진 곳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갔습니다. 도중에 그는 어린 소년을 태웠는데, 그 소년이 어머니 등 뒤에 업혀 있어서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논 사이의 길은 좁고 미끄러웠으며, 그래서 당나귀와 짐이 진흙 논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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