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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강 이남 최초 군산 3.5만세운동과 기독교역사3.1독립선언서와 학생단
  • 서종표 목사(군산중동교회)
  • 승인 2022.03.12 13:25
  • 호수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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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 선교사

1919년 3.1독립만세운동과 군산의 3.5만세운동이 전개된 지 어언 103주년이다.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힘을 모아서 민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라고 말한다. 3.1운동의 추진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력이 있는데 바로 학생단이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박희도와 이갑성 이 두 분은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 대표라기보다는 학생단의 대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실제로 이갑성은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박희도는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사감을 거처 중앙 YMCA 회우의 부간사로 있으면서 YMCA 학생사업에 관계하고 있었다. 일명 학생단의 독립운동은 1919년 1월 27일 경성 중국 음식점 대곤원에서 시내 전문학생 대표들이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2월 12일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있는 이갑성의 집에서 김원벽, 한위건, 김형기, 윤자영, 이용설, 김문진, 배동석 등은 세브란스 의전 YMCA 학생회에서 만남으로 독립 학생단 조직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학생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천도교 대표와 기독교 대표들이 3.1운동 거사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어 이 계획에 학생단이 합류하므로 자체적인 계획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 후 세브란스 의전 YMCA 학생회가 이갑성과 함태영의 지도하에 삼남 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의논하게 되었다. 이갑성은 삼남 지방을 맡기로 하고 자신이 대구 등 경상도 지역을 먼저 다녀온 뒤, 김문진을 대구로, 배동석을 마산으로, 김병수를 군산과 전주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2월 28일 밤 김성국과 김문진이 독립선언서 1,500매와 1,000매를 각기 이갑성에게서 건네받아 서울 승동교회와 정동교회에서 모인 학생 대표들에게 전달하고, 김병수는 100매를, 이용상은 대구 이만집과 마산의 임학진에게 400매를 전달하도록 하였다. 

학생단은 독립선언서 배포와 학생동원의 책임을 맡아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고 이어 3월 5일에도 제2차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주관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이 갑자기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자 학생들의 주도하에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세브란스 의전 학생인 김병수는 군산에 내려와 자신의 영명학교 선생인 박연세(朴淵世) 선생에게 서울의 소식을 전했다.

“경성에서는 (고종) 국장일을 맞아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지요?”(박연세에 대한 광주지방법원 군산분청 심문조서) 김병수는 박연세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다짐받듯 이렇게 물은 뒤 독립선언서 95장을 전달하였다. 박연세 선생은 동료 교사인 이두열(李斗悅)과 김수영(金洙榮) 선생과 논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영명학교의 교사인 고석주(高錫柱)와 개복동교회 교인 김성은(金聖思)·유희순(兪熙淳), 예수교병원 사무원 양기준(梁基俊), 유한종(劉漢鍾), 양성도(楊成道) 등과 의논하였다.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운동에 참여하였던 학생 조옥초(超玉肖)를 서울에 보내어 군산의 소식을 알리게 하고 군산 장날인 3월 6일(음 2월 5일)을 기해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두열, 이준명, 김성은 등은 학생 김영후(金永厚), 송기옥(宋基玉) 등에게 학교 기숙사 2층 다락방에서 선언서 3,500매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게 하며, 각 방면으로 연락하여 당일 집합 거사하도록 빠르게 진행시켜 나갔다. 그런데 거사계획 전날인 3월 5일, 영명중학교에서 오전 수업이 끝났을 때, 군산 경찰서의 순사 수명이 나타나서 이두열, 김수영, 박연세 등 교사를 연행하여 갔다. 

군산 경찰서의 일본인 순사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군산에 나타났다”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반일감정의 온상으로 지목해 온 영명학교를 주시하던 중 불란서 선교사(Bull)의 보고에 의하면 구암병원의 직원 한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을 하였고 마침내 거사계획을 자백하여 계획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거사계획이 좌절되기 일보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까지 표면에 나서지 않던 교사 김윤실(金潤實)과 학생들은 곧 긴급회의를 가졌다. 지금 당장 운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만사 수포(水泡)로 돌아간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학생 양기철(梁基哲), 전세종(田世鍾), 김영후, 송기옥, 이도준(李道俊), 홍천경(洪天敬), 고준명(高俊明), 유복섭(劉複燮), 오한길(吳漢吉), 강규언(姜圭彦), 강인성(姜仁聲) 등이 앞장서고 멜볼딘 여학교 학생들도 함께 나섰다.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구암동산에서 내려와 군산 시내로 들어갔다. 도중에 구암교회 교인들과 개복교회 교인들이 가담하였고 부근 주민들도 함께 나섰다. 보통학교 어린 학생들도 행렬로 뛰어들었다. 평화동(平和洞), 영동(榮洞)을 거쳐 본정통 큰 거리에 이르는 동안 처음에 100여 명이었던 만세 운동 대열이 점점 증가하여 5백여 명에 이르렀다. 

3.5만세운동 재현 장면.

학생들이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일부는 경찰서로 몰려가서 구속된 교사들을 석방하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어린 학생들도 일본 순경 앞에서 소리쳤다. 위협을 느낀 일본 순경들은 총을 뽑아 공포탄을 쏘며 물러서라고 위협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쏴 봐, 쏴 봐”하며 가슴을 풀어헤치는 등 대항하였다. 의외의 사태에 당황한 일본 순경은 긴급 출동하여, 이리(裡里) 주재 헌병대의 지원을 받아 주동 인물들을 강제 구속하고, 폭력으로 군중을 해산하기에 진력하였다. 뒤이어 군산 영명학교와 예배당을 수색하여 증거물을 수색하고 관계 인사들을 구속하였는데, 군산 영명학교에서 등사한 선언서 2천여 장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주동 인물로 확인된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은 3년, 김수영과 박연세는 2년 반의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고석주, 김성은, 양기준, 유한종, 임종우, 김영상, 문재송과 학생 유복섭, 고준상, 홍천경 등 30여 명은 6개월에서 1년 반 동안의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군산 3.5만세운동은 4.4솜리(익산)만세운동으로 이어갔다. 4월 4일 솜리만세운동 현장에서 있었던 군산 영명중학교 문용기 교사의 활동은 독립운동사에 찬란히 빛나는 별이었다. 문용기 선생은 당시 전북 군산 영명중학교 교사로서 남전교회의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4월 초순 이리역에는 문용기 선생의 주도로 남전교회 교인들과 1만여 명의 남녀 군중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의 헌병들과 순경들이 급히 출동하여 이들에게 검을 휘두르며 총을 쏘았다. 

문용기 선생은 앞장서 시위대를 지휘하면서, 시위대에게 연설을 계속하였다. 이에 화가 난 일본 경찰은 태극기를 잡고 있는 문용기 선생의 오른팔을 칼로 내리쳤다. 그러나 문용기 선생은 굴하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붙들고 ‘대한독립만세!’‘대한독립만세!’만세 소리를 더 높이 외쳤다. 그러자 일본 순경들은 문용기 선생의 왼쪽 팔을 내리쳤다. 

두 팔을 내리 찍힌 문용기 선생은 그래도 용기를 다해 몸으로써 태극기를 받치고 서서 군중들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재촉하였다. 무자비한 일본 경찰들은 칼을 들어 문용기 선생의 심장을 찔러 핏빛으로 물들여 놓고 말았다. 문용기 선생은 쓰러지면서도 “여러분이여! 여러분들이여! 나는 죽어 지하에서라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돕겠습니다”라고 외치면서 숨을 거두었다(박은식 저『한국독립운동 지혈사』).

3월 5일에서 5월까지 산발적으로 군산 시내에서 만세 운동이 계속되었다. 21회에 걸쳐 25,800명이 참가하였고, 일제의 만행으로 21명이 죽고, 37명이 부상당했으며, 145명이 투옥되었다. 주모자로 지목된 박연세 선생은 2년 6개월, 이두열 선생님은 3년의 형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군산 3.5만세운동 103주년이 되었다. 그때 당시 무저항으로 일본의 포악한 총칼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군산의 선열들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분들의 애국, 애족의 마음을 어찌 우리가 닮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들이 피 흘려 외치면서 지켜야 했던 우리의 소중한 조국, 그리고 우리 군산을 우리가 지키기 위해 어찌 다시 분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도 선열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나라를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것이 있다. 그분들이 가졌던 복음에 대한 믿음을,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믿음을 물려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꼭 다시 되돌아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127년 전 군산은 70여 가구가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나라도 일본 제국주의를 막지 못해 망했는데 이곳 군산 사람들이 그 후 25년이지나 무자비한 일본의 총칼 앞에 무저항으로 태극기를 휘날리고 길거리에 피를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될 수 있게 된 그 배후가 궁금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하게 하였는가라고 말이다.

바로 127년 전 전킨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 이 2명의 선교사가 군산에 들어왔고 수덕산에 초가집 두 채를 마련하고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지만, 이들의 진정성 있는 태도와 복음의 진리에 그들의 싸리 대문을 열고 마음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군산교회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전킨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는 단순히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다. 

군산예수병원을 세워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렸다. 군산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를 세워 세계적인 학식과 문물을 가르쳐 주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자유와 평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였다. 한글을 가르쳐 문맹의 눈을 뜨게 하고 여인들에게 가정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머슴들에게 인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일본의 악랄한 수탈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망해가는 나라를 어떻게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후에 한국의 유명한 애국지사들이 학교 선생님으로 봉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 나갈 길과 애국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이리하여 군산, 익산 그리고 호남 여러 곳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의 주역들은 대부분 군산의 영명학교와 멜볼딘학교 출신들이고, 기독교인들이었다. 만일 영명학교와 멜본딘학교가 없었다면, 그리고 군산예수병원, 구암교회 개복교회가 없었다면, 군산에서 이런 ‘3.5만세운동’과 그 후에 일어난 ‘옥구농민항쟁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군산 ‘3.5만세운동’103주년을 맞이하여, 군산에 와서 초가집 작은 방에 긴 다리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채 잠자면서 복음을 전하고, 근대화의 물결을 전해주었으며, 애국의 정신을 일깨워준 전킨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의 행적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전킨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가 전해준 그 복음에 대한 분명한 믿음의 자유, 특히 출애굽 신앙이 군산 ‘3.5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하겠다.

3.1 독립선언서 첫 글에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로 시작한다. 순수 한글로 읽으면“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유인임을 선언하노라”로부터 시작한다.

3.1 독립운동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노예이며, 자유가 없는 나라는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다. 우리나라는 1910년부터 45년까지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자유를 억압받으며 살았다. 그러므로 자유를 되찾는 날이 나라가 독립하는 날이다. 그래서 3.1 독립선언서에서 “조선인은 자유인이다”라고 선언하였다.

1919년 3월 5일 군산에서 만세를 불렀던 당시 우리의 선조, 군산의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일제의 억압 가운데서 해방시켜 주신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일본 헌병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만세를 부르게 한 것이다. 그렇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믿음은 의인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하나님이 나를 죄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음을,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 나는 자유인이다. 이렇게 공포하는 것이 3.5만세 운동 103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신실한 믿음의 주제가 되어야 하겠다.

서종표 목사(군산중동교회)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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