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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 엽 (落 葉)가을이 되자, 연인들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가득하고,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장밋빛이 가득해 보인다. 붉게 물든 가을 단풍으로 가득 찬 덕수궁의 돌담길이 요즘 들어 더 아름답게 보인다. 가을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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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0.15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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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과 소멸의 법칙

가을이 되자, 연인들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가득하고,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장밋빛이 가득해 보인다. 붉게 물든 가을 단풍으로 가득 찬 덕수궁의 돌담길이 요즘 들어 더 아름답게 보인다.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푸른 잎이 어느 새 붉게 물든 단풍으로 갈아입고, 이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쓸쓸한 나그네의 눈물처럼, 말없이 거리 위로 하나 둘씩 떨어진다. 낙엽이 지면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사유의 작업들이 이렇게 시작된다.

엘레아학파로 알려진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만물은 다양하게 변화하며, 그 변화는 곧 통일성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바 있다. 이는 만물이 자신의 고유한 형태 속에서 변화하지만, 그 변화 또한 자연의 섭리라는 통일성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낙엽이 땅에 떨어져 생(生)을 마감하지만, 그 마지막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낳게 하기 위한 자연의 부스러기이다. 마지막 잎새가 되어 땅에 구르는 낙엽은 무수한 유생물들의 거름이 되고, 나무가 겨울을 나는 동안 에너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르는 것이다. 이 놀라운 자연의 섭리는 “하나됨”을 위한 통일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가을 단풍으로 갈아입은 산은 다홍치마로 갈아입은 새색시처럼, 어여쁘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바로 단풍이 가진 숭고한 정신 때문이다. 이처럼 붉게 물들여진 단풍은 마지막 생(生)을 마감하기 직전에 더욱 붉게 빛난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단풍처럼 곱게 갈아입은 모습일까? 이런 궁금증으로 가득 찬 사유의 흔적들이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위기와 마지막을 경험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실존”에서 완전해 질 수 없다. 이로 인해 인간은 영혼불멸을 끊임없이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 무한성의 결핍을 깨닫는 순간 죽음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 죽는 것이 정해져 있기에(히 9:27), 이 죽음 또한 실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삶과 죽음”이라는 테마(Theme)는 지금껏 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에게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고민거리가 된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유한성을 가진 존재라는 공통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은 한 개인의 실존의 문제를 뛰어넘게 된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을 통해, 인간의 주체성 회복을 강력히 주장했다. 현대는 과학의 발달과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들 그리고 인간 소외의 시대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인간 주체성의 회복을 목표로 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이 요구되어야 하는 것은 그의 생각이었다. 인간은 규정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존재이다. 이것을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제1원칙이라고 말한다. 사물 존재에는 주체성이 없다. 그러나 인간 존재에는 항상 근원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주체성이 있다. 이 주체성 때문에 인간은 칼이나 책상보다 존엄하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따라서 기계적 세계관을 사르트르는 부정하고, 오히려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삶과 죽음의 균형을 강조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En Christo)

인간은 누구나 삶과 죽음의 연결 고리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살아가는 유적(類的) 존재이다. 이로 인해 인간의 생애는 전체적인 순환의 고리에서 점진적으로 발전과 퇴보를 겪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인간은 퇴보에서 또 다른 승화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바로 육체적인 퇴보에서 영혼의 승화를 거치는 과정 곧 “신앙의 요청”이 요구되는 과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신앙의 요청이 있고 난 후, 인간은 죽음이라는 실존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이라는 또 다른 제 2의 실존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to)"만 경험할 수 있는 실존을 우리는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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