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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표 목사, 호남 최조의 전킨선교사 연재(14)호남 최초의 병원을 세우다.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1.10.27 16:31
  • 호수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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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 선교사 (1865년 12월 13일-1908년 1월 2일)

드루는 조선에 도착 후 적응하기 전에 곧 바로 선교기지를 탐색하기 위해 햄든 시드니

(Hampden–Sydney)대학의 선후배 관계인 레이놀즈와 함께 1894년 3월 27일에 전라도 여행을 떠난다.

아침 7시 30분에 서울을 출발하여 오후 2시 30분에 강화도에 도착했고 3월 28일에는 제물포에 도착한 후 3월 29일 아침 8시 30분에 제물포를 출발하여 30일 군산항에 도착하였다. 제물포에서 군산까지의 배삯은 외국인 2달러, 한국인 1달러, 어린이 50센트였다. 그날 레이놀즈의 일기에는 군산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과 군산이라는 지역이 선교지로서 적당하다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서울에서 150일 마일 떨어진 곳으로서, 금강의 입구에 있으며 충청과 전라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마을 그 자체로 중요성이 없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위치 하나만으로 중요성을 갖는다. 나라가 개방되고 상업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군창은 비옥하고 인구밀집 지역의 항구로 될 수 밖에 없으며 지역의 수도인 공주와 전주의 입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정부의 증기선이 열흘에 한번씩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하여 정박한다. 전라도는 “곡창의 왕국”으로 일컬어 왔다. 군산창을 중심으로 반경 5마일 이내에 스물다섯 개의 쌀 농사 마을이 있다. 우리 선교회에서 군산창에 선교부를 세워야 할 이유는 셋이다.

(1) 접근성, 해안지대에 있으며 항구가 좋고 제물포에서 증기선으로 14-20시간 걸린다.

(2) 전주를 위한 선교의 공급기지로서의 중요성. 내륙으로 160마일이라는 거리로 인한 막충한 경비와 수송의 위험 대신에 군산에서 전주까지는 불과 35마일이다. 혹은 현지인들의 배로 군창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면 화물은 육로로 전주까지 13마일만 수송하면 된다.

(3) 인근 시골 지역의 많은 인구, 2명의 선교사로 감당하고도 남을 충분한 인구가 있다. 우리는 다음 해 가을에 군창에서 사역을 시작되기를 기대하며 선교부는 1895년 가을에 세워질 것이다.

아마도 레이놀즈 선교사는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우리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선교에 대한 열망을 가진 두 사람의 눈에는 미래 전라도 선교의 전진 기지로서 군산은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드루가 군산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몇가지 이유가 군산이라는 공간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처음 전라도 지방에 발을 디딘 곳이 군산이었다. 그는 “군산의 봄은 아름다웠다. 절대적 아름다움(extremely beautiful)을 느꼈다. 전체적으로 낮은 초가지붕은 건강에 좋지 않아 보였다. 산과 해안과 섬들은 아름다웠다. 기후는 온화하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이 없을 것 같다”고 보고하며, 복음 선교의 열매를 크게 기대하였다. 드루는 여행 중에 여권과 수술용 칼과 알약 몇 종류를 담은 작은 주머니를 매고 다녔는데 매년 전라도 길을 따라다니며 환자를 진료하는 소망을 가지기도 했다.

군산에 상륙하였으나 숙소를 찾지 못하고 현감이 있는 임피에 숙소를 얻었다. 이들 선교사는 군산에 도착한 후에 참사를 문안하였다. 이 자리에서 예수교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하였다.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들은 춥고 지루한 밤, 불편한 위생시설, 침구나 음식보다도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끊임없이 공격하는 빈대와 벼룩이었다고 회상한다.

이미 임피를 출발하여 전주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는 테이트 선교사 남매와 정해원 조사 부부의 영접을 받으며 전주 성문 밖 은송리에 짐을 풀었다. 4월 4일까지 정해원의 선교 전파를 하던 중 천주교에 대한 경고 벽보가 나붙자 더 이상 전주에 머물 수 없었다. 전주에서 나흘간 체류한 그들은 다시 4월 9일 태인, 금구를 둘러보았고, 11일에는 정읍을 지나 12일에는 흥덕, 줄포, 곰소를 답사하였다. 이어 더 남쪽으로 내려가 영광(4.16)과 무안, 목포(4.18-19)를 거쳐 해남(4.20-22)에 도착했고, 거기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나 홍양을 거쳐 진도(4.23-24), 고흥(4.27)을 지난 빌교(4.30)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드루는 발이 심하게 부어 여행을 중단하였다.

1894년 5월 7일 두 사람은 기선을 이용하여 부산을 떠나 5월 9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5월 12일에는 서울에 머물고 있는 가족을 만났다. 동학혁명군의 진격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동학군을 만나지 않고 일정을 무사히 마친 것도 다행한 일이었다.

1894년 레이놀즈와 함께 전라도 지방으로 여행 온 드루 의사가 자신의 부인을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킨에게 전한 천주교 신자 채영칠 노인의 서한은 기독교 의료 선교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사를 잘 보여주며 의료 선교에 대한 감사가 기독교 초기에 전라도인들의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귀한 통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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