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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 (86)그러니 떠난다는 것은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1.10.27 16:09
  • 호수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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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영(본지논설위원'속삭이는 그림들'의 저자)

낡고 오래된 것들은 사람의 깊은 곳으로 저절로 스며들어 사람을 흔들리게 한다. 야트막한 소금창고가 마치 모란디의 정물화처럼 아름답게 놓여 있었다. 모란디는 소금창고처럼 평생 살던 곳을 떠나지 않았다. 몇 가지 그릇과 조화만을 가지고 예술의 세계에서 살았다. 그런 소소한 소재들이 그림이 될까 싶은데 미미해서 더욱 우아한 정신의 세계가 되었다. 증도의 풍경 속 소금창고는 세상의 어떤 광활한 풍경에도 밀리지 않았다. 마치 모란디의 정물화처럼 거기 존재했다. 바닷물이라는 씨앗을 밭에 담고 물속에 숨어 있던 소금이라는 열매를 걷어내는 일. 햇살과 바람, 시간이 벗 해줘야만 하는, 어쩌면 어떤 농사보다 더 천수답 적인 농사, 증도의 염전은 세월과 자연, 사람이 함께 빚어낸 풍경이다.

섬에 미신이 많은 이유는 자연재해가 잦고 삶과 죽음이 지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천사의 섬 증도는 거의 모든 주민이 기독교인이다. 이 섬 저 섬을 이어주는 노둣길을 따라 걷던 한 여인의 발걸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무신은 일 년에 아홉 켤레가 닳아졌다는데 고무신 대신 교회가 세워졌다. 사랑했던 성도들을 위해 죽음의 땅으로 거침없이 회귀했던 문준경. <알을 까는 씨암탉>이란 일본인 순사의 모멸에 찬 문장과 함께 순교하신 분. 그러나 지금 이 문장은 그녀를 기억하는 우리에겐 더없이 아름답고 별처럼 빛난다. 그녀가 밤이 되면 홀로 올라 기도했다던 산은 길이 잘 닦여진 지금도 오르기 쉽지 않았다. 가없는 수평선을 보며 그녀의 삶을 묵상했다.

아침에 숙소에서 일찍 일어나 천년의 숲을 걸었다. 바로 곁에는 우전 해수욕장이 한도 없이 펼쳐지고 소나무가 그득 심어진 자그마한 숲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이 이어졌다. 예전에 왔을 때 천년의 숲길을 살짝 맛만 보았는데 얼마나 아쉽던지, 사람 하나 없는 숲길이었다. 하얀 모래사장이 천년 숲길과 벗하며 이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키 큰 해송을 건드릴 때 나는 서걱이는 소리, 가끔 이름 모를 새소리도 있었다. 모래사장으로 들이차는 파도 소리도 쉬지 않고 다가왔다. 파도 소리는 규칙적이지도 똑같지도 않았다. 유심히 들어보니 파도 소리는 그 모습처럼 다양했다. 사람 없는 숲길은 자연의 소리가 가득 차 있는데도 참으로 고요하고 적막했다. 바닷가 해송 숲에는 가끔 시가 적힌 조형물들이 있었다.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 때/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눈밝은 시인의 시를 읽으며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신 말씀이 새삼 느꺼웠다. 포구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건가 봐요 배’ 아주 먼 곳에서 정말 작은 멸치처럼 보이는 배가 나타났다. 이상하게 한참을 기다려도 배는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면서 아주 조금씩 커졌다. 배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배가 자라난다는 것을, 자라고 커지면서 그제야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모든 다가옴에는 먼저 자람이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알았다. 섬의 시간은 느리고 완만했다. 파도가 스쳐왔다가 다시 사라져가는 바닷가에서 얼마나 긴 세월을 저렇게 만나고 헤어졌을까를 생각했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혹시 그때 시간이 자취를 들어냈던 것 아닐까, 무한대의 시간 속에서 그 안의 점 같은 내가 만났던 게 아닐까, 오래된 사원 앙코르왓에서 갑자기 만난 스콜을 보며 비의 정체를 일별했듯이 그 순간 시간의 정체와 해후했을지도 모른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떠난다는 것은 일상의 벗어남뿐 아니라 삶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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