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본지논설위원'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해 저물어가는 가을에 어디에 매화가 피어서? 무슨 매환가? 하시겠지만 보다는 ‘읽다’와 ‘생각하다’를 품고 있다. 가을에 매화를 보다’는 맑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창문을 열어놓고 매화 그림을 보며 그림 속 매화를 읽으며 매화를 생각한 것이다. 조희룡이 쓴 <매화 삼매경>을 읽으면서 그가 그린 매화를 바라보는 일. 추사가 아들에게 쓴 편지에 우봉을 폄훼하는 글을 읽었다. 순간 추사가 달리 보이고 우봉이 궁금해졌다. 조희룡이 쓴 글 중에서 한영규가 발췌하고 해석해놓은 매화 삼매경을 읽게 된 배경이다.  

 수많은 매화 그림들이 진짜 매화를 그린 것은 아니다. 구구소한도 역시 봄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매화꽃이면서 일기예보이기도 했다. 화가들은 꿈속의 매화 생각 속 매화 이상적인 매화를 그리곤 했다. 매화를 그리며 인생을 생각했을 것이고 매화를 그리며 어디 이런 아름다운 여인 없을까…….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매화로 표현하기도 했다. 추운 날 피어나는 매화를 보며 내 이렇게 추운 삶이지만 꽃 필 날 있으리. 하며 미래를 꿈꾸기도 했으니까, 매화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고 그 마음을 사람들이 읽어주길 원했던 그림. 그러니 매화는 실제 매화가 아니라 작가의 마음이다. 매화보다 더 이르게 핀 생강나무나 풍년화 시춘목인 산수유도 있긴 하지만 매화는 그들과는 다른 격이 있다. 특히 오래된 고목에 피어나는 매화는 그 대비가 더욱 눈부시다. 거친 삶을 오래 견뎌온 나무, 스산한 세월과 며칠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꽃의 만남. 그러니 매화 피어나면 사람들은 저절로 형언키 어려운 삶의 비애를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매화는 태생적인 문자 향을 지니고 있다. 

 국립박물관에 전기의 매화 초옥도가 있다. 처음 보는 순간 나를 멈추게 하던 작품, 설레게 하며 세상일 요란하던 마음속을 잠재우던 그림. 아마 그런 사람을 만났다면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적인 사랑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서른 살에 고람전기가 죽자 칠십 살인 조희룡은 ‘흙이 무정한 물건이라 말들 하지만 이 사람의 열 손가락을 과연 썩혀 없앤단 말인가?’ 그의 재능을 이보다 더 아깝게 표현할 수 있을까,
  추사나 전기의 간결하면서도 온건한, 마른 난의 획을 보다가 우봉의 매화는 낯설었다. 그는 문자향을 강조한 추사보다 손이 이루는 재능을 중시했다. 조희룡의 그림이 일정 부분 아취를 발현하면서도 자유분방해 보이는, 감각적인 터치가 추사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다.  반듯한 길, 정도를 향하여 끊임없이 정진하는 사람이 분방하고 탈속한, 정진하지 않으면서도 한 획으로 제법 그림을 그려내는, 그것도 자기와는 전혀 다른 화풍으로 새롭고 기이한 정감을 포착하는 조희룡이 추사는 난감했을 것이다.

우봉은 소동파가 신선의 경지에 든 분으로 문자 유희의 붓을 놀렸다고 쓰고 있다. 그는 소동파를 빌어서 자신의 유희는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 삼아 흥에 따라 마음이 가는 대로 글을 쓴다는 자적의 상태라고 생각했다. 시문서화의 어떤 효용을 기대하기보다는 쓰고 그리는 일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심미성의 추구. 즉 그는 그 시절 다른 선비들이 하지 않는 자아를 우선으로 여기는, 현대적 예술가가 된 것이다. 매화를 사랑해서 매화차를 즐겨 마셨던 우봉은 추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화려한 매화를 그릴 때 이렇게 자유롭게, 이렇게 시원하게, 이렇게 힘 있게 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으로 추사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의 벼루에 새겨진 글은 깊은 협곡처럼 오묘하다. 
"한 조각 검은 돌로 천하에서 가장 흰 매화 그려낸다.” 가을 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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