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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36)Ⅲ.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1.07.28 14:11
  • 호수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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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운 박사 (교회사)

                 본지 논설위원/  전 성결대 총장, 교수

요한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19세기 성결운동

팔머의 성결론이 19세기 웨슬리안의 성결론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녀가 19세기 미국교회 내의 성결부흥운동을 일으킨 주요한 인물 중에 하나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팔머의 신학은 미국 19세기 초반 성결운동의 기원으로서 중요한 전기와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며, 그녀가 주도한 화요성결집회는 교회 안팎에서 성결모임의 전형이 되어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의 ‘캠프집회’ 전통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인스(Edmund S. Janes), 햄라인(Leonidas L. Hamline), 페크(Jesse T. Peck), 심프슨(Matthew Simpson)과 같은 감리교의 지도자급 목사와 감독 등 수많은 성결 지도자들이 이 집회를 통해 배출되었다.

팔머의 성결운동은 이후 19세기 후반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중심이 된 ‘기독교인의 성결촉진 고양을 위한 전국 천막집회 연합회(The National Camp Meeting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Holiness)’로 계승되었다. 한국성결교회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이 단체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감리교 목사 우드(J. A. Wood)에 의해 시작되었다. 1860년에 베스트셀러 󰡔완전한 사랑󰡕(Perfection Love)을 쓴 우드는 장로교 신자로서 웨슬리의 성결론에 매력을 느껴 감리교 목사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감리교에서 성결의 복음이 점차 약화 되어가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감리교의 부흥에 큰 영향을 주었던 ‘천막집회’를 재개하여 쇠퇴해가는 성결의 메시지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천막집회는 19세기초 제임스 맥그리디(James McGready)로부터 시작되어 침례교와 감리교에 의해 약 1840년대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당시 천막집회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회개시키며 침례교와 감리교가 서부 변경지역과 남부에서 지배적인 교단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 측 교회의 감독들은 감리교의 여러 신앙적 전통 중 천막집회의 상실에 대하여 깊이 통탄하며 성화에 대한 재강조를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천막집회로 상징되는 부흥운동의 회복만이 시대를 치유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던 대다수의 보수적인 감리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드 또한 성결운동의 회복을 위해 다시금 천막집회를 개최해야 할 것을 확신하였다. 그를 통해 성결을 체험했던 드레이크 부인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여 자신의 집을 개방하는 한편 성결운동이 시작된다면 천막집회를 위한 비용의 절반을 부담할 것을 자진해서 약속하였다.

우드(J. A. Wood)는 이 아이디어를 뉴져지 감리교 위원회의 오스본(William B. Osborn) 목사와 나누었다. 그리고 오스본 목사는 이에 열성적으로 동참하여 1867년 이 문제를 인스킵(John Inskip) 목사에게 제기하기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였다. 인스킵을 만난 오스본 목사는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결천막집회를 개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스본의 제안은 인스킵의 동의를 얻어냈고, 그들은 이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성결운동의 제안자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천막집회 장소를 뉴저지의 바인랜드(Vineland)로 결정했고, 일시는 1867년 7월 17일 수요일에서 19일까지 3일간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위원회는 그들 스스로 ‘기독교인의 성결촉진 고양을 위한 전국 천막집회 연합회’라 이름하였고 회장으로 인스킵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 연합회는 19세기 후반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 운동의 성공을 위해, 연합회의 창시자들은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집회에서 성결 이외에는 어떤 메시지도 제시되지 않도록 하였다. 무디(D. L. Moody)의 부흥운동이 불신자 대중들을 상대로 한 전도운동이라면, 이 집회는 기존 신자들을 상대로 한 은혜운동이었다. 1867년 7월 17일 바인랜드(Vineland) 천막집회를 위해 수천 명의 인파가 남부 뉴저지(New Jersey)의 소나무가 있는 평범한 곳에 놓인 찰스 랜디스(Charles Landies)의 모델마을에 몰려들었고, 10일의 집회기간 동안 그들은 기독교의 성결의 주제에 대한 설교와 권고를 조직위원회의 위원들과 심프슨(Mattew Simpson) 감독에 의해서 듣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2차대각성운동 때 천막집회(Tent Meeting)를 주도한 제임스 맥그리디(James McGre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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