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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세계적인 웨슬리 운동가 양기성 박사를 찾아서! ②“웨슬리언 운동을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은?”
  • 기독교헤럴드 편집국
  • 승인 2021.06.24 11:02
  • 호수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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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문수 장로(본사 사장)와 양기성 박사(청주신학교 교장).

성령받고 목회자·학자가 되기까지를 말한다.

한국에서 뿐만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웨슬리의 성령신학과 성결복음(이웃사랑)이 성결교회, 감리교회, 나사렛교회, 구세군교회, 순복음교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며 컨트롤타워이다. 웨슬리를 연구한 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현장목회와 신학이론을 겸비한 학자는 많지 않다. 이번 대담에는 어린 시절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한 친구의 전도를 통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나, 불타는 성령체험을 경험한 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목회자, 행정학자, 기도원장, 성령부흥사, 아동복지 사회사업가, 저술가, 교육가, 조직행정가로 세계 최초 ‘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를 창립했고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연구소를 설립하여 세계 6대 도시에 ‘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를 설립하고 47년간 웨슬리를 가슴에 품고 20여 년 가까이 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는 양기성 박사를 만나 세계 웨슬리 운동가가 되기까지의 자초지종을 경청했다.

본 기자는 지난 6월 7일 서울 강남의 모 사무실에서 양기성 박사와 기독교헤럴드 하문수 사장이 대담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웨슬리언 학자로서 세계적인 활동을 하게 된 동기와 배경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날 하 사장은 질문에서 양 박사의 성장과정 뿐만 아니라 청소년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면면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헤럴드>

Q. 존 웨슬리 생애와 신학을 배우고 전하며 가르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A. 그는 미국 조지아에 선교사로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와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 충동까지 받다가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 예배에 억지로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불같은 성령을 체험한 뒤 ‘종의 믿음에서 자녀의 믿음’으로 바뀌었다. 그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 신부 직책과 옥스퍼드대학교 영구교수직을 내려놓고 외가집 조부모와 어머니 스잔나의 청교도 정신으로 88년간 전 생애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한 책의 사람으로 이웃을 위해 헌신한 순교자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이 나의 롤모델(본보기)이 되었다.

그는 죽기 5일 전까지도 전도 일선에서 일했던 불타는 전도자였고 “내가 죽고 난 다음 내 재산을 1파운드만 남겨도 나를 강도라고 불러도 좋다”는 바울 사도의 생애와 같은 초대교회적인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신유은사가 있었음에도 병원을 세우고, 교도소, 광산촌, 윤락촌, 슬럼가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목숨 다해서 살다 천국으로 가면서 그가 남긴 명언 “하나님의 일꾼은 여기에서 잠드나 하나님의 일은 계속된다”는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노래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를 본받아 살기로 결단하고,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종남 박사님께 ‘웨슬리의 설교연구’ 논문지도를 받으면서 열심히 공부해 학교에서 성적장학금을 받았다. 신학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웨슬리의 지성을 본받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문학사(교육학)와 행정학석사 그리고 행정학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곧이어 서울신학대학교, 나사렛대학교, 성결대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동경 코넬신학교, 미국 카우만 신학대학원에서 20여 년 가까이 행정학 교수로 강의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웨슬리의 영성을 본받아야 한다는 나의 마음의 결심을 아시고 앞날의 일을 예비하셨다. 나에게는 어머니의 탁월한 신유은사로 하남시 산곡기도원에서 병 고침을 받은 어느 집사 한 분이 용인에 땅과 건물을 주셔서 ‘용인푸른초장기도원’을 설립하여 20여 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다. 한국의 유명한 수많은 부흥사와 성형사역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유머 있고, 즐거운 설교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한국성결교단의 이만신, 이용규 목사와 같은 유명 강사들이 전문 강사로 섬겨주셨다. 1983년 5월 충북 저산교회에서 단독목회를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미국 유학을 떠나려던 나에게 청주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을 해왔다.

Q. 목회사역은 어떠셨는지요?

A. 청주 그 교회에 부임하고 보니 빚더미 속에 폐쇄 직전의 교회였다. 그 교회에서 개척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교세가 안정되면 유학을 가리라 결심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3년 만에 신자 수가 180여 명으로 크게 부흥하게 되었고, 매 주일 새 신자가 등록했다. 어느 날 강화도 출신의 감리교 집사가 출석했다. 예배 중 하나님께서 준비된 자가 있다는 감동을 주셔서 주일예배 후 “여러분 중에 준비된 자가 있다고 하시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라고 광고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심방 중 한 집사가 “나에게 저는 목사님의 설교에 크게 감동하여 강화도에 있는 저의 땅 2,000평을 주님께 바치겠다. 주님께서 준비해 주셨다”라고 간증했다. 나는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 후 강화도에 가서 땅 2,000평을 바라보면서 엉엉 울었다. 한 집사의 눈물 어린 헌신과 주님의 뜨거운 사랑 앞에서 감동, 감동 그 자체였다. 교회개척 3년만인 1986년 9월 신자 200명 가까이 되면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새 성전을 건축했다. 그리고 황수관 박사 등 유명인사를 교회에 초청해서 간증집회를 열었다.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하여 250명을 넘어 1999년의 어느 날 새벽기도에 주님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내게 말씀하시면서, 세상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새천년에 새 땅에서 새 역사를 이루자는 마음의 감동을 주셨다. 그 이후 청주시 성화동 44번지에 두 번째 새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역시 지하 1층 지상 3층을 건축했고, 열정적으로 목회했다. 새 성전에서 교회 부흥이 소문나자 미국과 일본 서울 등지에서 부흥회 강사로 초청되어 집회를 맡아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미국과 일본의 큰 교회에서 계속적으로 담임목사 청빙을 해왔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느 날 믿음의 아버지이신 고 김현명 목사(기성 증경총회장)께서 여러 중진과 함께 청빙서를 가지고 청주에 오셨다, 감사하면서도 사양하자 포기하고 되돌아가셨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듣고 고 강선영 목사(기성 증경총회장)께서 전화를 내게 해왔다.

그분은 내게 “다른 목사들은 서울에 못 들어와서 안달인데 너는 왜 서울에서 사역을 거절했는가 이 사람아 바보처럼!”이라고 말했다. 나는 “예수님이 좋아서 신학을 했고, 바울 사도와 존 웨슬리 같은 삶을 존경하기 때문에 지방도 좋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미국과 일본, 서울지역의 교회에서 여러 번의 청빙을 받았으나 거절했고, 지금의 교회 청주우리교회를 개척하여 40년 가까이 즐거움으로 목회를 이어오고 있다.

Q. 목회자로서 웨슬리언 학자들과 웨슬리언 교회지도자협의회의 조직적인 활동을 하게 된 사연을 말해주시오.

A. 목회에 열심을 내던 2003년 존 웨슬리 탄생 300주년 기념 제1차 세계 웨슬리언지도자 대회가 LA 윌셔 연합감리교회에서 열렸다. 당시 나는 준비위원장이란 중책을 맡았다. 한국에서 서울신대 조종남 박사와 한영태 박사, 감신대 김홍기 박사, 나사렛대 임승안 박사, 예수마을교회 장학일 목사 등 한국에서 50여 명이 대회에 참가했다.

기독교헤럴드 편집국  dsglory36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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