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 본지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저자

어디서나 <습지>가 보이면 마음이 동해.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지를 보러 갔는데 온통 습지더군. 습지 사이로 데크가 아주 길게 놓여 있었고, 바람이 서늘한 날이었어. 아무도 없는 긴 데크를 걷는 데 정말 참, 너무, 심하게 좋은 거야. 왜? 습지만 보면 좋으니? 내가 내게 물었어. 의외로 사소한 것도 이유를 물으면 생각해야 하고 생각하다 보면 결국 의미와 가치 철학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아. 철학이 머 별거냐고, 생각은 그 단초고 삶을 생각하며 원리를 찾다 보면 그게 철학인 거지,

습지를 좋아하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어서일 거야. 얼마나 많은 생명이 저 안에 그득한가 말이지, 우선 저 갈대들, 그리고 몇 그루 안 되는 나무들 아래 보이지 않는 무수한 생명들을 생각해보면 습지가 지닌 넉넉함이 내 마음까지 풍성하게 해준다는 거지. 어쩐지 습지에서는 모두 공평하게 살아갈 것 같아.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여. 크게 자라려고, 남과 다르려고, 애쓰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선지 습지는 자유를 그득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해, 이렇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그 자유를 나눠주는 것처럼 여겨지고,

양양쌍호 습지는 습지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광활했어. 우리 동네에 있는 안곡 습지가 작은 둠벙이라면 쌍호 습지는 호수 같았어. 그러고 보니 순천만 그 거대한 습지도 생각나고 아름다운 우포 습지는 아직도 못 가봤네. 나와는 달리 박물관부터 들어간 남편이 나중에 그러더군. 이 습지에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고기를 잡고 채취를 해서 먹고살았다고,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아득해졌어. 그 옛날 사람들이 낚시하고, 열매를 채취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 그들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미래의 사람인 내가 여기서 그들을 생각하네,

사람 없는 넒은 습지를 홀로 걷는데, 바람들이 새순에 의해 밀리고 있는 늙은 갈대를 흔들리게 하는데, 저 초록 새순도 아름답지만, 습기 속에 살면서도 습기가 다 빠져버린 늙은 갈대, 금방 새로운 것들에 잠식되어 버릴 늙은 갈대의 연한 빛깔도 괜찮더라고,

사람들은 ‘시듬’을 무조건 싫어하지, 추하다고 여겨, 주름이나 쳐짐은 자연처럼 자연스러운 건데, 사실 ‘시듬’은 아름다운 정원 아닌가, 젊음이 지니지 못한 시간들이 고여있고 고난도 자리하고 있지. 슬픔의 노래가 들려오는 무대가 있는 삶의 작품 아닌가 말이지, 나무도 그러지 않던가, 꽃 피는 시절은 어느 순간이지. 화무십일홍, 꽃이 있어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 단지 꽃이 활짝 피어날 때 사람 눈에 잘 띌 뿐이야. 나무는 그저 묵지근하게 긴 시간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어. 나무도 꽃만을 화양연화로 여긴다면 나무의 생은 너무 쓸쓸할 거야.

바람 때문일 수도 있었을 거야, 바람은 나뭇잎만 흔들리게 하는 게 아니고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조차 흔들리게 하거든, 모든 흔들리는 것은 참 아름다워. 나무도 흔들릴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 뿌리까지 흔들리는 것 말고, 아주 살짝 조금씩 흔들리는 것, 뿌리까지 흔들리면 너무 깊은 상처를 입거나 혹은 상처를 주고 말아, 아름다운 것이 아무리 우리를 흔들리게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것은 이미 아름다움이 아니거든, 그러니 흔들리는 마음이여, 이것을 기억해야 해, 사람의 도리가 있듯이 아름다움의 도리도 있다는 것을,

남에게 혹시 상처를 줄까, 평생 두려워하며 살아왔지. 소심과 전전긍긍의 삶이라고나 할까, 스스로도 참 답답하다고 여겨질 때도 있었지. 자유분방한 사람들이 바라보면 저게 삶이냐 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쌍호 습지에서 문득 든 생각, 그래 내가 서 있던 그 자리가 남에게 상처를 받으면 받았지 주는 자리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서 지금 이렇게 습지 속에서 편안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여행이 주는 너그러움 때문이었을까, 내가 내게 너그러웠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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