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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교회 성장사(45)]<제5편> 한국 성결교회 성장기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1.05.07 15:24
  • 호수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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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제114주년차에 이른 한국성결교회의 지나온 고귀한 역사를 기독교헤럴드가 다시 조명하여 전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상기시킴으로서 성결복음을 새롭게 교훈 삼고자 여기에 안수훈 목사의 저서 ‘한국성결교회성장사’를 연재한다.

제3장 환도와 교회 재건

제1절 환도와 총회

한국성결교회는 일본 제국주의 압재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폐교와 모진핍박에서도 목숨 걸고 견디며 교단의 사명을 다하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여 기쁨으로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다고 믿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별안간 6.25사변이 일어나자 물밀 듯이 내려오는 공산군을 막을 길이 없어 국군은 남쪽으로 밀리고, 피난민들은 대전, 대구, 부산, 거제도 그리고 제주도까지 마구잡이로 몰려가 대한민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때 U.N군이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전세는 역전되었고, 국군과 U.N군은 북진하기 시작하자, 파도처럼 밀려 내려왔던 북괴군은 민간인의 옷으로 바꿔 입고, 패잔병이 되어 북으로 도망치게 되었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국군과 U.N군은 북쪽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추격해 올라갔다.

그러나 계속 쫓기기만 했던 공산괴뢰군은 중공군을 끓어 들여 재차 남침하기 시작하여 1951년 1월 4일 국민들은 어쩔 수없이 국군과 U.N군을 따라 또 다시 남쪽으로 피란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두 번째 피란생활은 1953년 7월 29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쪽으로 몰려가 있었고, 정부를 비롯한 각 사회단체 그리고 한국교회와 기독교단체들도 이곳에서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정부가 1954년 환도하게 되어 피란민들과 각종 단체들은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성결교회도 피란생활 3년여 만에 1954년 4월 20일 제9회 총회를 개최하고 ‘환도기념 총회’라고 명칭하였다.

이날 총회는 참으로 감개무량한 총회였고, 더구나 1957년 교단창립 50주년을 준비하는 사업들을 결정하는 총회로서 “희년기념회관건립과 기념출판과 1천 교회목표운동”을 결의하고, 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했다.

한국성결교회는 피란 중에도 많이 부흥하였고, 성장해서 제9회 총회에서 보고된 교세를 보면, 교회 수 309개, 목사 118명, 남녀전도사 13명, 세례교인 11,642명, 학습교인 6,866명, 구도인 21,948명, 어린이포함 총교인수 76,312명이 되었다.

1952년 피란을 시작하기 전에는 한국성결교회가 264개 이었다. 피란 중에는 45개나 교회가 증설되었고, 전쟁과 피란의 고된 생활을 견디면서도 한국성결교회는 가시밭에 백합화처럼 빛나는 역사를 남기며, 꾸준히 성장했다고 결과를 보고한 것이다.

제2절 환도 후 교회재건(1)

한국교회는 6.25동란을 겪으면서 모두 다 파괴되었고, 당시 파괴된 교회들이 내 버려져 방치된 상태에서 1952년 1월 14일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각 교단 대표들이 모여 ‘교회재건연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교회건물 재건뿐만 아니라 주일학교 설치와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교육, 문화, 사회, 후생, 농촌, 경제,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분과위원회를 조직하여 연구했고 활동하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노력은 세계교회들이 한국교회를 도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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