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영(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아무래도 진달래는 시집갈 날 다가오는 설레는 아기씨 꽃이 아닐지. 연분홍 꽃잎은 발그레 상기된 아기씨 볼,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 미려하게 다가오는 옅은 향기 역시 때 묻지 않는 아기씨 향기라. 해가 설핏 기울어져 갈 때 햇살을 가득 받는 진달래를 보라. 마치 습자지처럼 얇고 투명한 분홍 살이 얼마나 곱고 여린지, 세상사에 아직 손 담그지 않은 아기씨 살빛 아닌가, 꼿꼿하게 고개를 세울 줄 모르는 자태 역시 아기씨다. 분홍 옷고름 입에 문 아기씨처럼 얼굴 반쯤 가린 채 배시시 옆으로 고개 돌리며 피어난다. 그러니까 삼월 삼짇날 화전놀이는 아기씨 놀이라고 해도 좋겠다. 남자들은 땔감과 솥을 가져다가 산자락에 설치해주고 돌아온다. 여인들은 빛이 잘 드는 산자락에 모여 찹쌀가루를 기름에 지져낸 뒤 진달래를 그 위에 살짝 얹는다. 꽃 같든 젊음을 기억해 낼 수도 있겠지. 꽃처럼 고왔던 지나간 시절 때문에 속으로 울컥할 수도 있다. 바람이야 거기서 거길 텐데 진달래를 거쳐 다가오는 바람은 추억의 불씨처럼 마음을 서럽게도 하고 기쁘게도 한다. 훠이, 훠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 마음을 화전으로 다독인다. 부꾸미를 먹는 게 아니라 꽃을 먹는다. 진달래 화전으로 꽃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시간이었을까,

갓 삼십 되었을 때 아주 깊은 산골에서 이년 여 살았다. 그때만 해도 단독 목회는 필수였다. 동네에 홀로 사는 여인과 아들이 있었다. 드문드문 교회에 나오곤 했는데 갑자기 여인이 중풍으로 눕게 되었다. 교인들 몇 분과 함께 그분을 돕기 시작했다. 이불을 빨고 음식과 집 안 청소를 해주었다. 그 집 방안에 들어서면 숨이 턱턱 막혔다. 이불을 빨려고 들고나오는 잠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재래식 화장실 냄새는 양반이었다. 신기한 일은 그 집을 다녀올 때마다 그 냄새와 이불, 여인의 몸을 다 기억하면서도 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 비위가 굉장히 약해서 집안에서는 결벽증 환자로 불리던 내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일 이후로 비위가 강해지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여인이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죽음이라고는 외할머니를 떠나보내는 일뿐이었는데, 영혼이 떠난 몸을 그때 처음 봤다. 돌봐줄 친척도 없어서 면사무소와 동네 사람들 교회가 함께 장례를 치렀다. 그녀의 관은 경운기에 실려졌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가 모는 경운기를 타고 그녀의 관을 따라 산골짝으로 들어가는데 세상에, 분홍빛 진달래가 온산을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 동네에서 바라본 진달래와는 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선연한 아름다움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죽음과 함께여서였을까, 내겐 정말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경상도에서는 진달래나무 숲에 꽃 귀신이 산다고 하여 진달래 필 무렵 어린이들을 산에 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혹 봄날 건조한 산에 불놀이라도 할까 봐서 그랬을 텐데 그래도 진달래나무 숲의 꽃 귀신이라니....참 서정적이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진달래꽃이 피면 이름 없는 무덤에 꽃다발을 놓아주는데, 시집 못 가고 죽은 처녀 무덤에는 총각들이, 총각 무덤에는 처녀들이 진달래 꽃을 꽂아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속설에는 처녀, 총각 귀신을 달래지 않으면 원혼이 나타나 혼사를 망쳐 놓는다고 했다니.... 미소 지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옛사람들의 정한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눈부신 봄날 온 산야에 가득 핀 진달래꽃 앞에 서면 누구든 못 견디게 외로워질 것이다. 지천으로 피어난 진달래 속에서 생은 고독해지고 거기 쓸쓸한 무덤이 있다면 진달래 꽃을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달래는 이름도 많아 ‘만산홍(萬山紅)’으로도 불린다. 형제의 전설이 어려 있는 두견화를 비롯해 물가에 피어나서 수달래, 앳된 낭자를 연달래, 성숙한 처녀는 진달래, 노처녀는 난달래라고 했다. 옛이야기는 아득하고 진달래를 부르는 이름들도 죽음처럼 사장되었다. 아기씨라는 단어도 이제는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봄 진달래는 무연히 무연하게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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