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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 박사의 창문칼럼(48)손현보 목사의 삶과 소명
  • 최 선 박사(Ph.D., Th.D.)
  • 승인 2021.02.24 15:36
  • 호수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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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시골에서 전답(田畓) 없이 어머니 한 분이 가정 경제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가 6.25 한국전쟁이 끝나고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에서 군사 정권이 들어서고 경제개발에 고삐를 틀어 매고 있었다. 그 시절에 경남 김해로부터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손현보 목사의 삶과 그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복음을 전하며 영혼구원에 전력하는 생애 속에 역사하셨던 삶의 훈훈한 교훈을 갖고자 한다.

그는 경남 김해시 생림면 무척산(703.m)기도원(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고신 측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 성도 애국지사들이 구국기도회를 하였던 장소) 아랫동네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하고 자랐다. 논과 밭도 없이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둘째 부인으로 낮, 밤에도 일하시고 쉼 없이 무엇인가 일손을 놓지 않으며 4명의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존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러함에도 그의 가정에는 경제적인 빈곤은 해결되지 못했고 심지어 중학교 때에는 몇천 명의 전교 학생들 중에 자신만이 말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옆 친구가 선생님에게 짝을 바꾸어 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열등감 속에 중학교를 다녔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10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시골마을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꾸었다. 너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돈이 다 어디 갔나? 그 돈 먹어 보고 죽고 싶다”라며 한탄을 밥 먹듯이 하였다. 예수 믿기를 권고받았지만 거부하였던 그가 정신적으로 헤매던 중학교 3학년 때 마음 따뜻한 친구의 전도로 20여 명 정도 모이는 시골 작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회에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니 참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겠습니다.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겼다.

손 목사는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어머니의 일손을 도우며 진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시간을 내어 성경을 많이 읽고 교회를 섬기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에 전력하였다.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을 품고 있으면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라는 말씀을 의지하고 힘든 생활을 견디며 집에서 703M가 되는 산 중턱에 있는 무척산기도원까지 반가마니의 쌀과 생활용품 등을 지개로 옮겨 주며 모은 품을 용돈으로 중, 고교까지 사용하였다.

그가 입학원서를 갖고 접수하여 고신대학교에 합격은 하였는데, 어머니는 워낙 가난한 집안에 등록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안 되어 걱정하였다. 특히 외사촌들은 전부 동아대, 부산대를 졸업하였는데 외삼촌은 “논 30마지기가 있어야 그 수익으로 공부를 하지. 논도 없는 가난한 네가 어떻게 대학교를 다니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삼촌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분명히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입학금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중이었다. 평소에 인사를 나누던 부산 주례 삼거리 철길 위에 올라가면 불현사가 있는데 승려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승려가 “어 자네 웬일인가? 그래 대학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나?” 예 합격했습니다. “요즘 등록금은 비싸지?” 60만 원입니다. “그럼 등록금은 있나?” 없습니다. “그래…저기 가서 놀다가라” 네, 하고 그는 언덕을 넘어 산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내일이 등록 마감 날인데...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을 갖고 있으면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는데...”하며 2시간 동안 찬송하며 뜨겁게 기도하고 내려왔다. 시골 아주머니가 절에서 일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그럼 승려를 만나 인사를 하고 가라고 하였다.

승려를 만나 인사를 하는데, “자네 등록금 낼 돈이 없지?”라며 60만 원을 주시며 격려를 해 주셨다. 그러나 자신은 갚을 능력이 없다고 고사하였으나 그냥 주는 것일세. 신학대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숙식할 곳을 못 찾자 다시 절로 들어갔다. 불현사찰에서 잠을 자고 1년 동안 통학을 했다는 손 목사는 그 당시 도와주셨던 승려를 참으로 고마워했다.

일반적으로 청년들은 군대가 “잃어버린 시간, 없어져야 하는 시간”이라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하여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라며 기도했다. 신학대학 12월 3일 전 날까지 학기말 고사를 치루고 군입대를 하였다.

손 목사는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차출되어 701 특공대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교회에 간다고 하면 선임들이 피 터지게 구타하고 얼차려를 주었다. 그래도 그는 교회에 갔다. 후에는 입술과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절뚝거리는 상황에서도 교회에 갔다. 나중에는 본인만 갔다가 전도하여 소대 전체가 복음화되었고 대장까지 예수 믿고 집사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

그가 특공대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태권도, 특공무술도 자신이 없었다. 하루는 장군, 중령 등의 지휘관이 입회하는 특공대 공수교육 행군이 있었다. 이때 하나님이 자신을 이곳에 부르신 뜻을 발견하였다. 쓰러진 동료 2명 중의 한 명 것 25kg을 앞으로 메고 자신의 것은 뒤로 완전무장 한 채 다리에 나비가 날 정도의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완주하여 최고 지휘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최종지점까지 달려 1등을 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동료가 과로하여 부대에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를 기점으로 손 목사는 특공부대 대장으로부터 특공모범상을 받고 군부대에 도서관을 만들며 장병들의 정서와 교양을 위해 노력을 하고 군 생활에서 소대 전체를 복음화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인간적으로 볼 때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매우 부족한 사람임에도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꿈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소망을 갖고 살기로 작정하였다. 부산에서 시골마을에 다섯 번의 교회 건축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예배당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지금까지 손현보 목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멋진 역사를 목격하였다. 누구나 개인적인 삶의 여정은 다르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원망하며 희망을 잃고 삶을 포기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는 예수 안에서 희망을 품자.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소원을 갖고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이 시기를 당당히 극복하며 살아가자.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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