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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까지 R. J. 토마스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인식 형성과정 고찰(5)게일의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마펫의 토마스 선교사 평가
  • 이은선 박사(교회사)
  • 승인 2021.02.20 16:53
  • 호수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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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안양대학교 신학과 교수 및 교목실장)

그러므로 게일은 이 글을 게재할 때 한국인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먼저 공격한 것이 대원군의 명령을 따른 조선 군대였을 뿐만 아니라,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서술하여 제너럴셔먼호와 최난헌을 변호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1909년 이전 선교사들의 평가에서 셔먼호 사건이 없었으면 복음의 문이 빨리 열렸다”는 제목 하에 “마펫트와 다른 선교사들이 불식하려고 노력했던 부분이 바로 19세기 중반에 유행했던 토마스 식의 힘을 앞세운 선교였다. 그들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없었더라면 평양의 복음의 문이 더 쉽게 열렸을 것으로 보았다”는 뉴스앤조이에 실려 있는 옥성득의 해석은 재고될 부분이 있다고 판단된다. 평양에서 마펫과 함께 선교활동을 하던 그래함 리도 그의 선교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원산에서 활동하던 게일도 변호적인 관점에서 제너럴셔먼호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일방적으로 비판적으로 평가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본다. 이미 1884년 런던선교회를 방문하여 토마스의 죽음을 알았던 언더우드는 1908년에 저술한 『조선의 부름』(Call of Korea)에서 토마스가 목사이면서 런던선교회 소속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다. 토마스는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사의 역할로 승선했으며 승선한 모든 사람들이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언더우드는 토마스를 스코틀랜드인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선교사역이 스코틀랜드인 로스와 매킨타이어에 의해 계승된다고 설명하였다.

2. 마펫의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

1909년 한국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가 이루어진 곳은 바로 그가 죽음을 당한 평양이었고, 계기는 1909년 8월 평양에서 개최된 장로회 선교 25주년 기념식이었다. 마펫 선교사는 한국에서 이루어진 성공적인 선교역사를 회고하면서 그 선교의 출발을 토마스 선교사로 잡았다. 장로교 선교 25주년 기념식이었으므로 1884년 알렌에서부터 선교역사의 출발을 잡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마펫 선교사는 알렌이 아니라 1865년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했던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시작하였다.

내한한 첫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인 토마스로 그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권서로 1865년 중국어선을 타고 황해연안에 한문성경을 반포했다. 1866년 런던선교회와 연관되어 있을 때 그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왔으며 한문성경을 가지고 왔다. 그는 산산조각이 나고 불에 탄 그 배에 탄 선원들과 함께 망했는데, 도시의 바로 아래 강변에서 죽기 전에 가지고 온 <신약전서> 여러 권을 나누어주었다.

마펫의 토마스에 대한 대부분의 공식적인 평가는 이미 앞에서 여러 선교사들이 공유하고 있던 내용들이다. 첫째로 토마스를 한국에 내한한 개신교의 첫 선교사로 언급한 것은 그래함 리였는데, 아마 마펫 자신이 먼저 이 사실을 알았고 늦게 온 그에게 설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펫은 당시 선교사들의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시점을 1865년 토마스의 1차 선교사역으로 잡았다.

그러므로 토마스의 조선에 대한 선교사역은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전인 1865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분명하게 인식하였고, 이러한 점에서 조선에 내한한 첫번째 선교사를 토마스로 인식하였다. 그보다 먼저 1832년에 조선에 와서 성경을 나누어주었던 귀츨라프에 대해서 마펫은 첫번째 선교사로 언급하지 않았고 1865년에 우리나라에 성경을 반포한 토마스를 첫번째 내한 선교사로 서술하였다.

둘째로 마펫은 1865년에 토마스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올 때의 신분에 대한 인식에서 장로교와 깊이 관련시켰다. 먼저 그가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이고 다음으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권서라는 것이다. 언더우드는 1884년 런던을 방문했을 때 그가 웨일즈 인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는지 1908년 『조선의 부름』에서 스코틀랜드인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마펫은 다음 해인 장로교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이면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권서라고 서술하였다. 이러한 마펫의 언급은 앞으로 한국 장로교회에서 토마스를 장로교인으로 인식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셋째로 그는 토마스가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2차로 조선에 입국할 때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입국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토마스가 상해를 떠나면서 런던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1865년 9월에 조선으로 선교하러 출발할 때 윌리엄슨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권서가 되었고, 그의 추천을 받으면서 런던선교회에 복직을 신청하여 1866년 1월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2차로 조선에 들어올 때 그는 런던선교회 소속이었다. 그가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라는 것은 이미 언더우드가 언급하였다.

이은선 박사(교회사)  dsglory36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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