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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까지 R. J. 토마스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인식 형성과정 고찰(4)게일(James S. Gale)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기고
  • 이은선 박사(교회사)
  • 승인 2021.02.05 17:50
  • 호수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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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안양대학교 신학과 교수 및 교목실장

그는 원산에 거주하던 그 해 7월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전모를 서술했다. 이 사건을 말하는 목격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18세의 나이였고 그 혼란 속에서 등에 대포의 파편을 맞아 약간 절게 되었다. 게일은 목격자의 증언을 들을 후에, 적어도 이 사건은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라고 판단하여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발표하였을 것이다.

게일의 기고 가운데 첫번째 주목되는 점은 이 배의 통역자가 누구냐 하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토마스는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자로 승선했다고 이해되고 있는데, 오문환은 『도마스 목사전』에서 이를 부인하고 승객이었다고 서술하였다. 그런데 게일도 이 글에서 “갑판에 여러 명의 동양 사람들이 있었는데 키가 작고 검은 얼굴이었다. 이들은 글자를 알았고 통역자들로 봉사하였다”라고 설명하여 최난헌을 통역자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원들과 우리나라 문정관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하고자 했을 때 글자를 아는 여러 명의 동양인들이 통역자의 역할을 하였다.

둘째는 이 배의 “우두머리는 최난헌과 조능봉이다”라고 설명한다. 『고종실록』 7월 15일자 보고에서 최난헌이 배 안의 일을 주관하는 인물로 보고되고 있고, 1866년 7월 27일자 보고에 최난헌과 조능봉이 뱃머리에 나와 살려달라고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 배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최난헌이 서양인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알려져 있었다. 최난헌이 서양인이라는 것은 『고종실록』 7월 15일자 보고에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 목격자들과 평양사람들에게 최난헌의 존재는 충분히 알려져 있었고, 마펫과 그래함 리가 증언하듯이 평양 사람들 중에는 그가 성경을 반포하러 왔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었다. 물론 게일의 기록은 성경 반포나 투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셋째로 대원군은 “이 외국 배가 로마가톨릭의 새로운 침입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답변은 ‘그들이 즉시 떠나가지 않으면 살해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1866년 봄에 9명의 프랑스 주교들과 신부들과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살해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군함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 배를 천주교의 침입으로 생각하여 처형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넷째로 이 목격자에 따르면 군인들이 이러한 대원군의 명령을 시행하려고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목격한 미국인들이 중군을 억류하였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선군이 먼저 공격하여 싸움이 시작되어 4일간 지속되었고 전체 지방이 구경꾼들로 뒤덮였다. 그리고 서양 배의 대포의 위력이 너무나 커서 조선 군인들의 저항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여기서 이 목격자는 제너럴셔먼호가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조선군이 대원군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먼저 공격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게일의 이 글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일차적 책임이 제너럴셔먼호 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배를 로마가톨릭의 침략선으로 오해하고 공격하도록 명령한 대원군과 명령을 시행한 조선군에 있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로스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 사람들은 며칠 동안 친절하게 대우받았다.

그러나 서울에서 소식이 온 뒤에 그들은 강변으로 유인되어 사형에 처해졌고 배는 포위되어 화공공격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을 종합해보면,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대원군의 공격명령과 그에 따른 조선군의 선제공격이 발생원인이라는 어느 정도의 의견이 일치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다섯째로 최난헌의 죽음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강변에 도달한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은 백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반복해서 절을 하면서 백기를 흔들었다.

그러나 어떤 자비도 베풀어지지 않고 그들은 포박되어 사지가 찢겨졌다.” 『고종실록』에서 최난헌과 조능봉이 살려달라고 했다고 설명하는데 여기서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서 『고종실록』과 다른 설명은 “그러나 어떤 자비도 베풀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기를 흔드는 것은 항복하는 것이고 백기를 들고 항복하면 정상적인 경우에 자비가 베풀어져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러한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게일은 이 글을 게재할 때 한국인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먼저 공격한 것이 대원군의 명령을 따른 조선 군대였을 뿐만 아니라,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서술하여 제너럴셔먼호와 최난헌을 변호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1909년 이전 선교사들의 평가에서 셔먼호 사건이 없었으면 복음의 문이 빨리 열렸다”는 제목 하에 “마펫트와 다른 선교사들이 불식하려고 노력했던 부분이 바로 19세기 중반에 유행했던 토마스 식의 힘을 앞세운 선교였다. 그들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없었더라면 평양의 복음의 문이 더 쉽게 열렸을 것으로 보았다”는 뉴스앤조이에 실려 있는 옥성득의 해석은 재고될 부분이 있다고 판단된다.

평양에서 마펫과 함께 선교활동을 하던 그래함 리도 그의 선교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원산에서 활동하던 게일도 변호적인 관점에서 제너럴셔먼호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일방적으로 비판적으로 평가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판단된다.

이미 1884년 런던선교회를 방문하여 토마스의 죽음을 알았던 언더우드는 1908년에 저술한 『조선의 부름』(Call of Korea)에서 토마스가 목사이면서 런던선교회 소속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다. 토마스는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사의 역할로 승선했으며 승선한 모든 사람들이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언더우드는 토마스를 스코틀랜드인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선교사역이 스코틀랜드인 로스와 매킨타이어에 의해 계승된다고 설명한다. <다음호에 계속>

이은선 박사(교회사)  dsglory36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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