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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17)김상준 편 -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김상준의 생애와 사상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1.01.13 14:44
  • 호수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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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운 박사(교회사)

본지논설위원,  전 성결대 총장, 교수

Ⅰ. 김상준의 생애

여는 글

한국성결교회의 모교회인 무교정 복음전도관은 지금까지 앞서 살펴 본 주임 교역자인 정빈의 주도로 세워져 오직 십자가 순복음만을 전하고자 하는 전도 본위의 교단적 특색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었다. 동시에 같은 창립의 일원인 김상준을 통하여서는 19세기 북미를 중심한 성결운동 (Holiness Movement)의 단순한 전도 표제로 알려진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이 성서적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 교리로서 응축되고 강조되어 신학화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성결교회는 복음주의 노선의 초교파적인 교단으로서 한국교회의 3대교단의 하나로까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의 요인은 한국 성결교회 초창기로부터 교단의 교리적 내용을 주초화하므로 이론적으로 성결교회를 체계화하는 신학 작업을 시도한 김상준으로 인해서이다.

한국성결교회의 모체(母體)인 동양선교회로부터 배우고 전수받은 사중복음을 이 땅에 교리적으로 뿌리내리게 한 한국성결교회의 창립자이며 초기 신학자인 김상준의 생애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1. 기독교 입신(入信)과 일본 유학

김상준(金相濬)은 김상준목사의 외손자인 하재창장로의 증언에 의하면(1987년 12월 30일 대구 동산병원에서 필자와의 면담) 1881년에 평안남도(平安南道) 용강군(龍岡郡) 오신면(吾新面) 구룡리(九龍里)에서 엄격한 유교 집안 의성 김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한학자이기 때문에 김상준은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워서 한문에 남다른 식견(識見)을 가지고 자라났다. 천성이 곧고, 강직한 성격인 그는 성장하면서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자연히 유교의 전통에 젖어 들어갔다. 그러나 20살이 갓 넘은 어느 날 평양 시장에 나갔다가, 길에서 전도하는 사람들로부더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신하게 되었다. 사료(史料)의 제한으로 김상준의 입신 동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다음의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상준 목사

그 당시의 유림(儒林)들, 즉 조선사회의 체제와 학문 사상 등에 수구성(守舊性)을 견지하고 유교적 전통 질서의 확립만을 고수했던 최익현(崔益鉉), 이항로(李恒老) 등의 수구파 인사들은 개화파에 반대하여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제기하였다. 수구파 인사들은 기독교는 서교(西敎)인 오랑캐 종교이며,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 전통과 제전 및 미풍양속을 해치는 위험한 종교로 보았다. 그러나 반면에 지금까지 지켜 온 유교는 정학(正學)으로 보고 기존의 정치 체제와 윤리 사상을 고수하였으므로, 김상준의 부친은 물론, 김상준도 이러한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이러한 전통적 사고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의식의 전환(轉換)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당시 서북 기독교계 인사들과 같이 기독교 복음의 종교적인 동기와 동시에 당시 역사적 정황에서 요청된 상실되어 가는 국권(國權)과 독립을 회복하고자 하는 원동력으로서의 기독교를 현실적으로 인식한 면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김상준의 입교의 동기는 국권의 회복이라는 면에서 또한 당시 무력한 민중들이 기독교의 복음의 진수를 알기 이전에 선교사들의 보호 조치를 통한 민생안전(民生安全)에서 그 힘의 도움을 기독교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그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김상준의 기독교로 입신(入信) 후에 그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통하여 그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는 가두(街頭) 노방전도를 통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후 상투를 자르고, 조상 대대로 지켜 내려온 선조에 대한 제사를 폐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에는 엄청난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부친으로부터 매를 맞고, 김씨 문중으로부터 야소교를 버리라는 회유와 질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김상준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자, 이에 질세라 격노한 부친과 문중은 합세하여 하인들에게 멍석말이 죽임을 명하였다. 그러나, 천우신조(天佑神助)로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곽재근(郭載根) 목사는 이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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