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1.1.18 월 08:07
상단여백
HOME 독자기고 특별기고
최초탈북순교자 김유연 목사(6)교계와 교단에 기여한 그의 공로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12.31 15:00
  • 호수 502
  • 댓글 0
        김유연 목사

김유연 목사는 성실한 목회자와 교수로서의 헌신을 통해서 좋은 교역자상을 세웠지만, 그 외에도 그가 교단과 교계에 끼친 공적은 다양하다.

첫 번째로 문필을 통한 공헌으로 1930년대부터 1950년까지 교단지 ‘활천’에 적지 않은 글을 실었는데, 간결하고도 영감 넘치는 설교와 수상, 한시(漢詩)와 현대시 등을 투고하여 교계에서 문필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945년 광복 후 ‘활천’주필을 담당하면서 당시 교계의 유일한 신문인 ‘기독공보’의 주간(主幹)도 겸직하여 한국 교계의 문서선교에 공헌했다. 1946년 12월‘기독공보’사설에 게재한 “기독교와 문서선교운동”이란 제하(題下)의 글 속에 그는 문서선교운동의 중요성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미국 흑노 해방의 위업에 있어서 링컨의 배후에는 스토우부인의 명작소설이 있었다. 중세기 암흑시대에 광명을 던져준 이들은 누구인가? 존 후스의 베들레헴의 강단도 힘이 있었거니와 존 위크리프의 문서선교 운동이 더욱 큰 힘이 되었으며, 루터의 개혁사업에 있어서도 그의 위뎀벅 강단보다도 멜링토의 문서발표가 더 빛났다.

스코트랜드의 존 낙스의 강단과 함께 제네바의 존 칼빈의 문서저작이 얼마나 위력이 있지 안했는가?.. 이 땅에도 해방의 신 태양이 밝아 왔으니 때는 정히 필봉을 가다듬고 문화 진두에 나설 때가 아닌가?”라고 기고했다.

두 번째로 그는 교단 정치에서 그리스도의 화해 정신으로 화목을 도모한 교단 지도자로 알려져 있었다. 1935년 3월 제 3회 총회 분리 사건이 있었던 때 그는‘기독신보’에 성결교회 분규에 대한“수 언의 충고”라는 제하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쓰고 교단의 분열을 통탄하며 일치를 역설하였다.

“소위 분규의 내용이란 것을 보면 인물 편용, 교권 행사, 금전 남용, 공금 사용 등인데 타 교단의 단체와 달리 우리 교단 조직이 단순한 만큼 문제의 내용이라는 것도 해석의 견지에 따라 다를 것이니 그리 복잡 다 난한 문제도 아니므로 그 해결책도 용이할 것이니, 두말할 것 없이 ‘회개’ 두 글자로 낙찰될 것이다.”

“간부들은 평소에 덕이 박하고 신임이 후하지 못했던 것을 깨달아 법을 내세우기 전에 덕을 쌓을 것이며, 하해 같은 포용력을 가지라. 그리고 정치야 공화제이든 감독제이든 공정하게만 할 것이고, 편견 고착에서 떠나 대국(大局)적인 면에 착안하라.

다음으로 소위 반동파에게 드리고자 하는 말은? 단체를 진정으로 사랑하여 반기를 들었다면 어디까지나 단체를 살리는 것이 목적이거늘 평온한 교회를 소요케 하므로 이 틈에 순진한 양들이 ‘말 못 할 상처’를 입었으니 이 책임이 뉘게 있는가? 후일을 위하여 자중하라. 오! 분열, 이것이 우리 민족성이라면 이악한 근성을 위하여 울자,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울자. 그리하여 이악한 근성을 주님의 혈해(血海)에 던져버리고 주님의 최후 유언을 기억하여(요한복음 17장) 분열에서 일치로, 사랑과 공의로, 소아를 버리고 대아(大我)로 받들며, 육아(肉我) 죽이고 영아(灵我)를 살리자”고 기술했다.

그는 문필로 호소하고, 개별 면담으로 설득하고, 교단 의회 단상에서 화해와 일치를 외치면서 교단의 순결성 유지와 부흥에 한몫을 담당했다.

1945년 11월 9일 교단 재흥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1947년 제2회 총회에서는 총회출판 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단의 지도자로 드러난 것도 이러한 연고에서였다.

세 번째로 그는 교육 사업을 통해서 교단 내의 주일학교 운동의 효시를 열기도 하였다. 1934년 9월 10일 경성 유년주일학교 직원연합회를 창설 할 때 주역을 담당하였고, 성결교회 최초의 교육 잡지인 ‘주교지남’의 편집부장을 맡아 주일학교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각 지방에서 교사 강습회를 인도하였는데 ‘주교지남(主敎指南)’ 소식란에 보면 “신상균, 김유연, 양선생이 안성교회(10.22-27.), 여주교회(10.28-11.3.), 인천교회(11.19-25.) 등지에서 주일학교 교사 강습회를 열어 곳곳에 주일학교 교사들이 큰 부흥을 받았다”고 실려져 있다.

그는 ‘주교지남’ 창간사에서 “본지의 사명은 첫째로 사랑이니 종교교육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중심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종교교육은 육신과 육신, 정신과 정신의 접촉이 아니라 영과 영의 접촉임으로 교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접촉한 인격자라야 한다. 세 번째로 수양의 자료 즉 교수법, 관리법, 아동심리학 등의 지식적 발달을 도모하게 하려면 그 재료를 제공하고자 함이라”고 했다.

그는 교단의 교육적 과제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재 양성에도 주력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청년전국연합회, 주일학교전국연합회, 장로회 등을 창설한 평신도로서 교육 운동의 선구자였던 윤판석 장로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면서 큰일을 하도록 힘이 되어 주기도 했다.

네 번째로 그는 교계 연합기관에서도 교단의 파송을 받아 알찬 업적을 남겼다. 1949년에 합동찬송가가 발행되었는데, 그는 성결교회에서 전권위원으로 파송되어 합동찬송가 발행에도 기여한 바 있고, 기독교방송국을 개국하기 위한 준비모임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기독교헤럴드  cherald@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

기독교헤럴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