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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장과 前 헌법연구위원장의 불화설+부총회장과 총무의 불화설성결교단에 ‘군부’가 없을 것이라 믿고 싶고, 억울한 ‘드레퓌스’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09.09.1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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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단 판,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

 

성결교단은 교단 경쟁력 1위로 한국 교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또한 BCM 교육목회 관련 교재들과 한국성결교회연합회의 교재들은 대한기독교교육협회를 비롯한 기독교 교육 관련 단체들로부터 최고의 교재로 인정받고 있다. 아울러 성결인이며 아시아 최초의 여성순교자인 문준경 전도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남도의 백합화』가 출시, 상영됐고, CBS에서도 드라마로 제작하고 있어 성결교단의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 이 열기에 편승해 박우량 신안군수도 순교 관광지 개발 계획을 짜며 중앙정부에 엄청난 지원을 요청했고, 이재완 목사를 중심으로 순교기념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참 좋은 분위기이다.

반면에 이러한 좋은 분위기와는 달리 교단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권석원 총회장은 지난 5월 28일, 세한교회에서 열린 제103년차 총회 때 우창준 헌법연구위원장을 소환한 이후 ‘총회장과 前 헌법연구위원장’의 끊임없는 불화설에 휘말렸고, 그리고 원팔연 부총회장과 송윤기 총무의 심각한 불화설이 이어지고 있다. 결국 총회장이 사표를 내는 교단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고, 필리핀으로 출국해 언제 돌아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 모습은 마치 이정호 著, 『진실을 뒤덮은 편견의 프랑스』 (참세상 刊)에 나오는 드레퓌스에 대한 에밀 졸라의 변호와 비슷하다. 이 당시 프랑스도 두 쪽으로 갈라져 분열됐다.

분열의 원인은 무엇일까? 편견과 아집이 원인이었다. 한번 적대자를 규정하면 절대 바꾸지 않는 시각, 그리고 자신은 변하지 않고 상대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고집이 상대를 못된 죄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1894년 10월에 발생했다.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A.드레퓌스 대위는 참모본부에 근무했다. 그의 혐의는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것이었다. 이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 의해 종신형의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는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다. 사실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 때문에 혐의를 씌웠던 것이다. 인종 차별적 시각 때문이었다.

마치 전남지방의 A목사의 제보에 의하면, 충청지방의 B목사가 “전라도 것들”이라는 지역 차별적 발언을 반복해서 “비애감이 들었다”고 말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 후 군부에서는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확증까지 얻었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진상 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가족들이 1897년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심문과 재판을 거쳐 그를 무죄 석방하였다.

재판결과가 발표된 이후 에밀 졸라가 〈로로르(여명)〉지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논설을 쓰게 되어 프랑스가 논쟁의 늪으로 빠져 들게 됐다. 여기서 언론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이후 졸라는 1898년 1월 13일자〈오롤〉지를 통해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공개장을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후 프랑스 전체가 ‘정의.진실.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 즉 재심파(再審派)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反) 드레퓌스파 또는 반 재심파로 분열되었다.

전자는 자유주의적 지식인을 비롯하여 사회당·급진당이 가담하여 ‘인권동맹’을 조직하였고, 후자는 국수주의파·교단을 집권한 보수교회·군부가 결집하여 ‘프랑스 조국동맹’을 결성하였다.

1898년 여름 군부는 어떤 새로운 증거서류에 의거하여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언하였으나, 그것이 날조로 판명되고, 체포된 증거서류 제출자는 자살함으로써 반(反) 드레퓌스 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정부도 재심을 결정했으며, 또 이때 반 드레퓌스 파에 대항하면서 공화정 옹호를 내세운 발데크 루소내각이 들어서게 됐다.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된 후 법정 투쟁을 계속한 끝에 드레퓌스는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판결을 받고 복직 후 승진도 하였다. 사람의 시각에 따라 한 사람을 무기징역으로 몰고 가 평생 감옥에 살게 할 수도 있고, 무죄로 만들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 말 조잡하게 조작된 증거들로 엄청난 죄인으로 만든 인종 차별의 위험성을 보여줬다. 결국 10년 간의 법정 투쟁 끝에 드레퓌스가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었을 때, 프랑스 국민들은 진저리를 치면서 그 사건에 대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 없이 그저 묻어두고 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재발을 막을 수 없다.

 

이러한 인종 차별과 경쟁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쟁탈과 유럽 강대국들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퍼져 나갔다. 결국 이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채 똑같은 분열상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성결교단에 ‘군부’가 없을 것이라 믿고 싶고, 억울한 ‘드레퓌스’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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