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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두암교회 순교역사지 탐방6·25전쟁과 공산군이 교회를 몰살시켰다!
  • 탐방: 하문수 대표기자, 정리: 박지현 편집국장
  • 승인 2020.12.16 17:27
  • 호수 501
  • 댓글 1

        두암교회 성도들과 윤임례 집사 가족의 순교

 
윤임례 집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두암교회(홍용휘 목사)가 1947년 1월 7일 전북 정읍시 소성면 두암리 마을에 세워졌다. 두암교회는 젊은 청년 김용은이 어머니 윤임례 집사의 자택에서 처음 예배드림으로 시작되었다.

이번 호 순교지탐방에서는 1950년 6·25 사변으로 공산군에 의해 교회 성도와 전가족이 몰살당하여 순교하기까지의 두암교회 역사와 그 후예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신앙 성숙의 기회로 삶고자 한다.

 

1. 두암리 마을의 신앙 동기

당시 김용은 청년은 인근 마을에 사는 김금주 집사의 전도를 받고 6km 떨어진 정읍시 입암면 천원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던 차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신앙생활하였는데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다.

그는 한 가정의 장남이고 가장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므로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전도하였다. 김용은이 어머니 윤임례 여사와 동생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한 것이다.

그 후 김용은은 일본 유학을 거쳐 함경남도 흥남에서 주물공장을 경영해서 크게 성공한 뒤 고향인 정읍으로 돌아와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기장교단인 정읍제일교회에 출석하며, 집사 직분을 받아 충성하게 된다.

 

순교정신을 기리는 기념탑

 

2. 두암교회의 개척 스토리

그러나 그는 신앙이 깊어갈수록 고향의 두암리 마을 식구들이 십 오리나 되는 입암면 천원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안타까워 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먹고, 1946년 겨울이 오기 전 두암리 마을에 살고 있는 김선신 장로를 찾아가 수요일 저녁예배와 새벽기도회를 부탁하여 가정예배를 드리게 했다.

이로 인해 김용은은 1947년 1월 7일 두암교회를 세우고, 마을사람 전체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소원했으며, 그의 소원대로 마을 사람들은 전도를 잘 받아들였다. 그 후 교회가 튼튼하게 부흥되자 그가 평소에 존경하던 이시문 목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하던 일을 접고, 1947년 3월경 기성교단에서 운영하는 서울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두암교회의 예배는 어머니 윤임례 집사와 동생 김용채 집사가 주관하여 드렸고, 김용은 신학생은 방학 때 고향에 내려와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과 흥남에서의 사업이 크게 성공하였던 터라 그동안 주민들에게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혜택을 많이 주었던 것이 크게 영향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두암교회는 눈에 띄게 날로 부흥하여 주일학교, 학생회, 장년부가 조직되었고, 목회적인 차원에서 왕성한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3. 두암리 마을에 공산당 침투과정

때마침 1950년 6.25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정읍지역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첫째는 전봉준, 최제우, 손병희 등이 주도한 동학혁명이 이웃 마을인 정읍 고부에서 일어나 농민들이 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신념으로 정부에 대한 강한 저항 의식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둘째는 일본의 압제로 인해 가난한 농민들이 추수한 곡식을 공출당하여, 군량비로 보냄으로  인하여 양식이 없는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외세에 대한 두려움이 민심으로 자리 잡고 있던 시기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 사회는 북한의 남침으로 빨치산 부대를 남파하여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어 있었다. 전쟁의 소문이 혼란의 시기를 타고 불안한 심리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지리산 계곡 속에 자리 잡은 빨치산들은 이미 정읍지역 주위에 들어와서 밤이면 마을에 내려와 가난한 농민들의 마음을 읽고서 공산당만이 농민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다는 선전을 그럴사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감언이설로 농민들의 아픈 마음을 싸매어 주어 호감을 사게 하고, 더구나 북한 공산당은 같은 동족이므로 일본군에 당한 외세의 두려움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더구나 공산당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거짓된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선전하자, 반미 운동이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합장묘

 

4. 공산당의 감언이설과 협박

이 시기에는 아무리 나쁜 공산당이라도 같은 동족이므로 일본 사람이나 미국 사람보다 나을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과 생각을 바꾸기에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고 공공연히 선전하면서도 기독교는 아편과 같아 몹시 나쁜 종교라는 루머를 퍼트리며 폄하해서 저항 의식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때 김용은 전도사는 북한에서 사업을 하면서 공산주의가 거짓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을 지도자들에게 찾아가서 거짓된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설득하고, 그들의 거짓은 얼마 후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들은 반드시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마을주민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마을주민들이나 기독교인 중에 공산주의에 저항할 힘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김용은 전도사는 1949년 12월 농한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북한 실정을 알리기 위해서 북한의 공산당 조직을 경험한 임동선 전도사와 함께 소성면과 입암면 그리고 성내면에 있는 3개 면의 마을마다 다니면서 사상 강연과 전도집회를 하면서 북한 공산당의 거짓을 폭로하고 좌익사상을 공격했다.

 

5. 김용은 전도사의 반공 투쟁

이러한 김용은 전도사의 활동 상황을 알고 있는 공산당들은 그에 대하여, 김구 선생과 친밀하

고, 전주예수병원의 미국 조요셉 선교사를 초청하여 두암교회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들을 죄명으로 하여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내부적으로 확정한 상황이었다.

공산당 빨치산들은 김용은 전도사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할 것으니 협조를 부탁하며 접근을 하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공산당은 예배 중지를 명하였다.

김용은 전도사가 약속이행을 하라고 항의하자, 그들의 대답은 전시 중이므로 잠시 중단하는 것이라고 거짓 변명으로 일관하였으나, 김용은 전도사가 믿지 않자 얼마 후 반역죄로 체포 명령을 내렸다.

 

김용은 목사

 

6. 공산당들의 살육전이 시작

공산당 빨치산들은 돌변하여 마을주민들에게 죽창을 들고, 밤이면 밤마다 횃불을 들고 가택수색을 하면서, 김용은 전도사를 찾아오라고 독촉하며 만일 붙잡아 오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김용은 전도사의 씨를 없애야 한다면서 주민들과 친족들을 간담이 사늘하게 하고, 누구도 공산당을 거역할 수가 없다면서, 김 전도사의 어머니 윤임례 집사에게 이제라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하면 살려 줄 것이니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라고, 여러 번 협박했다.

생과 사의 경각에도 윤임례 집사는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으니 죽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당신들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고 하면서 오히려 전도했다.

 

김헌곤 목사

 

7. 윤임례 집사와 가족부터 순교 시작

공산당 빨치산들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윤임례 집사가 교회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칼로 목을 쳐서 죽이고, 교회당에 불 질렀고, 후에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윤임례 집사는 강대상 아래에서 목에 칼이 꽂힌 채 무릎 꿇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때 둘째 아들 김용채 집사는 총살당하고, 3명의 손주는 빈 우물에 생매장당했으며, 김용은 전도사의 아들 성곤은 몽둥이로 타살당하는 등 일가족 22명과 박호준 집사와 김용술 청년은 항문에 말뚝을 박아놓고 칼질을 해서 죽이고 김정두 성도 가족과 김환두 성도 가족은 죽창과 칼로 찔러 죽인 후 불로 화형시켜 버렸다.

 

8. 순교자 후손들에게 신앙의 열매

순교자 윤임례 집사와 일가족의 피는 두암교회 신앙의 밑거름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김용은 목사와 김용칠 목사 형제는 기성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하고, 대형교회를 이룩하여 교단 발전에 크게 헌신하였으며, 직계가족에서 26명의 목회자 배출과 평신도 지도자로 김용석 장로를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후손들이 있다.

6·25전쟁이 끝이 나고 10여 년이 지났으나 너무나도 깊은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누구도 싸매어 주고 위로할 수가 없었으며, 누구나 쉽게 두암교회를 재건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때, 후손 중에 20대 청년 김태곤에게 성령님이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1964년 두암마을에 주일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두암교회는 재건하게 된다.

재건된 두암교회는 시작과 더불어 부흥하게 되고, 1966년에는 교회를 새롭게 건축하였고, 임시 매장을 한 순교자들의 무덤을 교회 동산으로 이장하여 ‘순교자 묘역’으로 합장했으며. 그 후 매년 10월 중순 순교자 합동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다.

 

9. 순교신앙의 기념 역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전북지방회에서는 지난 1977년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한 1차로 순교기념탑을 세웠으며, 김용은 목사를 비롯해 지방회 소속 교회들의 협력을 받아 순교 기념 교회당을 건축하고, 지금의 순교 탑은 총회 순교자기념 사업회에서 1994년에 세운 것이다.

2020년 10월에는 기성 전주지방회 순교자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고 헌당과 추모예배를 드리고, 전국교회들과 함께 순교의 정신을 기리고 기쁨을 나누게 되었다.

 

두암교회 순교 70주년 기념관

순교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순교자 윤임례 집사의 피가 신앙의 열매를 맺었다.

자녀: 김용은 목사(군산중동), 김용석 장로(서울성서), 김용칠 목사(전주태평), 서명선 목사(부안 남포).

손 : 김영곤 목사(서울오이), 김헌곤 목사(문준경순교기념관), 김 곤 목사(서울창성), 김낙중 목사(서울성서), 김명곤 목사(일산산성), 김재곤 목사(전주태평), 김태곤 목사(군산은광), 김미숙·김정팔 목사(시흥큰빛), 옥주호 목사(호주), 옥형호 목사(뉴질랜드), 옥병호 목사(호주), 옥명호 목사(수원 사랑의), 김혜순 전도사(수원 은혜와진리).

증손: 김진오 목사(서울한빛), 최 헌 목사(군산은광), 송재혁 전도사(뉴저지), 백승엽. 김일란 선교사(스페인), 김진성 목사(서울서호), 노소구 목사(이천예광), 김진수 전도사(천호동), 최요셉 전도사(안양중앙), 목회자 26명 배출과 외가에도 19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다.

복음의 능력은 한 가족을 잃은 피를 토하는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아픔이 있었고, 당시 김용은 청년은 치안대장으로 보복할 수 있었지만, 그는 형제들과 눈물을 삼키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해자들을 용서했고, 더 나아가서 50여 년 동안 가해자들을 찾아가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주동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두암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결과로 열매를 맺게 했다.* 두암교인들 가운데 헌신한 자는 김미경 목사(소망교회), 이원석 목사(대성교회), 이윤덕 목사(은혜동산), 유인상 목사(새권능), 이윤섭 목사(강남중앙)가 있다.

 

두암교회의 현재 

 

탐방: 하문수 대표기자, 정리: 박지현 편집국장  dsglory36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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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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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록 2021-01-28 12:44:35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함 ! 두암교회를 세우신분은 따로게시다.
    두암교회의 모든 기록은 엉터리. 한 목사 가족을 우상화하는 것이다
    김용일목사 (용은)도 이렇게 되기를 바랄까
    김용일을 전도하고 두암교회를 세운 집사님의 가족은 어한이 벙벙하다.
    하나님도 기절 하실 것이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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