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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14)정빈 편 -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정빈의 생애와 사상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12.03 11:06
  • 호수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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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운 박사(교회사)

본지  논설위원 , 전 성결대 총장 . 현  동 대학  교수

 
 Ⅲ. 정빈의 사상
 
  특별히 사사오 목사는 1890년부터 영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성결운동을 일으키며 선교 사역을 행하였던 벅스톤(Barclay Fowell Buxton)의 제자로서 특정한 한 지역에 선교 활동의 범위를 제한시키는 것을 지양한 그의 영향을 크게 받기도 하였다. 또한 이것은 동양선교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만국성결연맹 및 기도 동맹’(1897년)이 교파적인 교권 형성을 반대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교회, 즉 새로운 신약 성서의 교회에 대한 표방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정빈은 동경성서학원 수학 당시 존경하고 따랐던 동양선교회 초대 부총재였던 사사오와 마찬가지로 계급 사회적인 성직 제도나 이것이 더 구체적인 가시적 조직으로 드러난 기성 교단 형성에는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정빈의 스승이었던 사사오 목사가 일본 성교단을 떠나고 죽은 일이 정빈의 사역지 변경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은 무관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1914년과 1921년에 19세기 신앙 선교 단체와 비슷한 초기 복음 전도관의 특징을 갖고 있었던 동아 기독교로의 전향은 정빈이 당시에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으로 나타났다.
 
  3. 구습(舊習)에 대한 개화사상
 
  기독교는 19세기 초(1832년, Karl Gutzlaff 입국)부터 20세기 초엽까지 서세 동점의 역사와 더불어 한국에 전파되었다. 안으로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분야에 있어서 아직 외세를 맞이할 준비가 공고히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 나라는 이 때 자주화와 개화를 동시에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물밀듯이 들어오는 외세를 적절히 통제하여 자기 체질화시키는 작업이었기 때문 에 외래문화의 수용을 통한 개화와 함께 주체성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기독교의 전래와 함께 개화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사료의 한계로 정빈의 구체적인 개화 의지를 살펴볼 수는 없지만 정빈은 개화의 한 방편으로서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또한 당시 한국 사회의 구습에 젖어 생성된 한국 교회의 의식 구조와 비합리적인 생활에 대하여 자신의 개화 의지를 그리스도 신문을 통해 고국의 성도들에게 펼쳐 보였다.
 
정빈은 「그리스도 신문」을 통해 일본 유학 생활 가운데 한국보다 앞서서 개화의 문을 연 일본 사회의 여러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여 구습에 젖은 한국 교회에 서구적 합리주의와 기독교적인 새로운 윤리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과거의 전통적인 구습이라도 그것이 해(害)하고 이(利)하지 못하면 과감히 수정하고 개혁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우리는 구습이 되어 그리하고라도 예수만 잘 밋엇스면 쓰지 혹 이러케 생각들어가나 외국을 와셔 남의 풍속을 보고 그 일에 대해야 올코 그른 것과 이기고 지는 형편을 비교하여보니 우리들의 이왕한 모든 거시 다 지혜업는 일이오 또 첫째로 쥬의 뜻세도 합당치 아니하여이다. 혹 누가 말하기를 수백년 나려온 풍속을 일죠일석에 곳칠 수가 잇나 그렁뎌렁 지내며 보지 이러케 말하는 이가 만흘터이나, 아름답지 못한 규모는 오란거시라도 곳쳐야 올코 또는 일을 행하는 날이 업스면 엇지 열매 잇는 날이 잇겟소.”
 정빈은 이에 조선에 있는 서울 교회들이 교회당 안에 휘장을 치고 남녀를 구분하여 앉히는 유교 전통의 구습에 젖은 당시의 부조리한 형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며 교회 안의 휘장 철폐론을 『그리스도 신문』(1906년 3월 8일자)에서 다음괴 같이 주장하였다:
 
 “또한 말삼은 다름 아니라 내가 이곳 와셔 보니 성경 공부할 때나 기도회로 모일 때나 남녀 학도들이 한 방안에 좌우로 갈라안고 괴도 찬미하고 그중에 깃봄을 엇은 자나 그시이 있는 쟈나 회중에 니러서고 혹 자복도 하고 혹 증거도 하면 여러 형뎨 자매가 듯고 그 중 근심하는 쟈는 위하여 기도하야 그 마음에 평안함을 엇도록 간절히 간구하고 또 깃봄으로 증거하는 쟈의게는 일시 찬송하야 그 밋음과 깃봄을 더욱 배양한즉 우리 갓흔 외국 사람의게까지 애정이 균일하게 밋침으로 향샹 위로함을 밧삽나이다. 이것슬 보고 우리 교회의 형편을 생각하니 다른 곳슨 널니 보지 못하였슨즉 자세히 아지 못하거니와 셔울도 말하야도 이런 풍속이 적고 또한 이때까지 회당 한복판에다가 휘장을 치고 내외를 불통하야 삼사년을 회당에 단녀도 어느 형데와 어느 자맨지를 아지도 못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만흐니 이러케 서로 막고 통하정이 업서셔야 엇지 애정이 생기며 교회가 엇지 진보될 수가 있소.”
 
 전통 사회의 이변으로도 받아들여질 당시 교회 안의 휘장 철폐의 문제는 1913년 예수교 장로회 조선총회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져 개교회 당회의 사정과 형편대로 해야 한다는 신중론이 나왔다.
 또한 정빈은 직접 복음전도에 우선하여 동경에서나 무교정 복음전도관에서도 개인전도, 노방 전도, 심방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여 상대적으로 의료나 문서 매체를 통한 간접 전도의 소홀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교육을 통한 구국(救國)의 가능성을 일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을 통해서 내다보았다. 정빈은 『그리스도 신문』(1906년 3월 15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동경셔 한국 유학생의 수효가 한 삼백여명 된다는대 그 중에 각각 목덕이 잇서셔 혹 신학 전문하는 이도 있고 혹 실업 젼문하는 이도 잇고 다른 보통 학과 사학에 일참된 사람도 잇는대 그 공부에 경도는 일본 사람들의 말을 더러도 어학은 각국 사람 중에 데일 수히 깨닷고 공부의 진보가 매우 속하다 하옵니다. 실제 내가 목도하여 보는 대도 한국 학생의 등급이 조곰도 일본 사람의게 느리지 아니하니 미우 감샤한 일이오. 우리의 장래 젼정이 다 이곳셔 유학하는 청년들의게 잇는 줄노 분명히 밋삼니다.”      
 (다음호에 계속)
 
남녀를 구별하여 앉히기 위해서 1908년 건립된 기역자('ㄱ')교회인 금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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