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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순교자 김유연 목사 기념 문집(3)최초의 전도관 무교정교회 시무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11.26 12:13
  • 호수 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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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연 목사

1. 목회자로서의 면모(2)

성결교회 최초의 전도관이였던 무교정교회는 역사적으로 성결교회의 모교회로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으나 1940년대에 들어서부터 가중된 일제의 감시와 압력으로 무교정교회의 교세는 급갑한 상태였다.

그러나 김유연 목사는 최선을 다하여 목회하던 중 1940년 5월 24일 일본 형사에게 검거되어 구속되었다. 경찰서 고등계는 주로 사상범을 다루는 부서였는데 이곳으로 끌려온 김 목사는 암하(岩下)라는 일본형사로부터 끔찍한 심문을 받았다. 김 목사는 그의 수기(手記)인 “쓰라린 추억”에서 그가 당한 고문의 체험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김 목사는 “뼈를 바삭 바삭 긁어내고 심장의 피를 바짝 바짝 말리는 듯이 취조를 당했으며, 몇 번이나 욕을 먹고 발길에 걷어차였다. 내가 이 유치장에 들어올 때에 추녀 끝에 깃 드린 비둘기가 알 낳은 것을 보았는데, 그 알이 새끼 비둘기가 되어 날아갔고, 다시 알을 낳아서 그 새끼가 또 날아갔지만, 자유를 빼앗긴 나의 몸은 언제나 이 유치장을 벗어나 볼까나, 한이 설인 탄식을 비둘기 날개에 실어 먼 하늘로 날려 보기도 몇 번이나 하였다”고 기록했다. 

김 목사는 이렇게 옥고를 치룬 후 출옥하였으나 이미 교회는 강제로 해산되어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고,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진 후였다.

그의 수난의 목회가 이렇게 끝나 버리는가 하였으나, 그의 목회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몇 년의 옥고를 치룬 후 출옥한 김 목사는 여윈 몸을 이끌고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평택 안중읍 밤바위라는 작은 시골마을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는 일제 말기에 서울 거주민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킨 이주민 마을이었다. 

고요한 농촌의 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그는 고구마 농사를 짓는 한편 5리 밖에 있는 목회자 없는 농촌교회에서 봉사하였다. 하지만 이 낙향 목회시절에 그는 사랑하는 열두 살 된 어린 딸을 영양실조로 잃어버리는 아픔을 당하게 된다. 

이후 김 목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후 서울로 올라가 일본의 군수공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무교정교회를 다시 찾는 한편 성결교단 재건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리고 1945년 11월에 개최된 재흥총회 부의장으로 피선되어 교단 재흥을 위하여 백방으로 뛰면서 당시 경성 신학교를 복구하여 개교하고 신학교 성서학과 교수로 봉직했다. 

한편 그의 목회에 대한 정열은 막을 수 없어 그는 교수로 봉직하는 동안 마포에 위치한 신공덕동교회 (현 신덕교회)를 담임했고 이 목회사역은 1950년 8월 공산당에 의해 납치당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김 목사는 신공덕동교회 5년간의 목회에서 예배당을 확장 건축하였고, 성결교회의 평신도 선구자인 강경교회 출신 윤판석 집사를 장로로 장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써 홍종현 목사와 김석규 목사를 비롯한 유능한 목회자들을 배출해 냈다. 

김 목사는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 때 공산당의 잔악성을 잘 아는 북한에서 남하한 동료 목사들이 피신하라고 권유하였지만 끝내 “섬기는 교회와 신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남아서 있겠노라”고 고집하였다. 

결국 공산치하의 서울에서도 그는 납치 당하기전 주일까지 그가 섬기던 신공덕동교회의 문을 열고 남아있던 신자들을 모아 예배를 인도하다가 8월초에 납북 당하였다.

그의 목회는 한마디로 강력한 매력으로 압도하는 설교가 중심이 되면서 온화한 성격으로 신자들을 감싸주는 사랑의 목회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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