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0.10.21 수 18:51
상단여백
HOME 논단 젊은지성
시인 최 선 박사의 창문 칼럼(34)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 살린 맥아더 장군
  • 최 선 박사(Ph.D., Th.D.)
  • 승인 2020.10.14 15:18
  • 호수 494
  • 댓글 0
 최 선 박사

한국전쟁 때에 우리나라의 6.25 서울 수복(9월 28일)은 국군과 UN군의 반격으로 한국군 제3사단이 38도선을 북진했던(10월 1일: 국군의날) 역사적 의미가 있다. 2020년은 남북전쟁 70주년의 역사적인 해로서 국민은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분들께 감사한다.

특별히 이번 기고에서는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과 연희고지 전투를 생각하고 그 의미를 통해 나라 사랑의 마음을 되새기고자 한다.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김일성이 주도한 남북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주일 아침에 북한 공산군이 38도선(55마일)을 넘어 소련제 T34 탱크를 선두로 해서 불법으로 기습 남침하였다. 전쟁이 발발한 3일 후 인민군은 수도 서울을 함락하였고 북괴군은 거침없이 남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UN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서울을 점령한 지 한 달 만에 급속히 남쪽으로 내려온 북한군은 대구 북방 7km까지 남진하여 최대 위기를 맞이하였다. 낙동강 주변에서 인민군과 미군과 한국군은 생과 죽음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최후 일전을 앞둔 미군과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한국군은 다부동 전투로 말미암아 대구 지역을 지켜낼 수 있었다.

북괴군에 의해 파죽지세로 몰려 대구와 부산을 남겨둔 대한민국이 헤어 나올 수 없는 최악의 남북전쟁이 이어졌다. 이를 극복할 방안으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북한군의 후미를 철저히 차단하여 전쟁의 승기를 역전시키기 위한 작전을 세워 놓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대한민국 서울을 속히 탈환해야 한다는 결단으로 크로마이트(Chromite Operation) 작전을 감행하였다.

북한군이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천상륙작전의 인식을 하지 못하도록 맥아더는 통영 상륙작전(8월 17일), 서해안 포격 상륙작전(9월 4일), 군산 상륙작전(9월 12일), 삼척 포격 상륙작전(9월 13일), 영덕 장사상륙작전(9월 14일) 등의 양동작전을 펼쳐 북한군을 교란했다.

인천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다. 먼저 월미도를 선점한 후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고 인천시가지의 북한군을 단번에 소멸하는 것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스트러블(Arthur. D. Struble)해군 제독의 지휘 아래 연합군 261척의 함정과 약 75,000여 명의 병력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1단계로 미국 제5해병연대와 제3대대는 06시 33분에 녹색 해안인 월미도에 상륙하였고 2단계로 미 제5해병연대와 한국 해병 제1연대가 적색 해안인 만석동 지역에 오후 밀물 때 17시 33분에 방파제로 올라 상륙하였다. 미 제1해병연대는 청색 해안인 송도 해안도로 부근에 17시 32분에 상륙하여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인천을 수복하고 경인가도 진격전을 전개함과 동시에 9월 18일부터 미국 제7보병사단과 육군 제17연대가 서울 수도를 탈환하기 위한 연합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후 가장 치열했던 ‘연희고지 전투’는 일제 강점기부터 선교사들에 의해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로 시작하여 세브란스병원이 운영된 캠퍼스에서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수복까지 주요 전투가 2단계로 볼 수 있는데 서울로 진격하기까지 1단계(9.21~24, 서부지역 전투)와 2단계 (9.25~27 시가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연희고지 전투’(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 제1, 2동에 있는 산으로 연희104고지, 연희산, 염산)는 1950년 9월 21일 16시 15분에 미국 제5해병연대에 내려온 공격 명령으로 시작되어 동년 동월 23일에 끝났다. 우리는 1단계를 일명 ‘서부지역 전투’라고 부른다. 이 서부지역 전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가 연세대학교 교정 내에 있는 ‘56고지’ 전투(연대 과학관 자리)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후 104고지, 105고지 전투를 치른 후에 연합군은 진격하다가 56고지에서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발이 묶였다. 그러나 스미스 중대(스미스 중위)의 희생적인 활약(당시 36명 전사, 270명 부상)으로 고지를 탈환하게 되었다.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56고지를 빼앗는 계기로 곧바로 서울 수복을 위한 시가전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는 결정적인 전기가 56고지를 점령하고부터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서울 시가전에는 도로에 장벽을 설치한 장애물 철거로 시간과 병력의 손실이 컸다. 이처럼 서부지역 전투에서는 56고지에서 연합군의 많은 희생이 있었다.

연세대학교 교정 뒤편에 있는 안산(250M) 정상에 올라가면, 서울시내(인왕산, 청와대, 서대문형무소)가 한눈에 확 들어온다. 그래서 서울의 목줄인 56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북괴군이 그토록 사력을 다해 막으려 했다.

위기에 몰렸던 대한민국은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과정에서 있었던 연희고지 전투는 이 두 사실을 이어주는 중요한 전투였다. 그래서 당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또한 부상을 입고 평생을 불편함과 어려움 속에서 살았던 국군장병들에게 위로와 치유가 있기를 기원한다.

누구도 전쟁을 좋아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국력이 약하면 강자에게 위협을 받는다. 따라서 경제와 외교, 국가의 안보 및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 국민은 바른 국가관을 가져야 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서 헌신하신 분들을 반드시 기억하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역사적인 현장을 자주 찾아 자유를 지켰던 과정이 이렇듯 피 흘림의 대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한반도에 다시는 이러한 동족상잔의 끔찍한 전쟁이 없기를 소망한다.

최 선 박사,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

최 선 박사(Ph.D., Th.D.)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