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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교회 성장사(23)제3장 성결교회 성장과 활동주역들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09.09 15:40
  • 호수 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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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량전도대 기념

2020년을 맞이하여 창립 제114년차가 된 한국성결교회에 대하여 기독교헤럴드가 성결복음의 역사에 대한 기원을 찾아서 다시 한번 돌아보고자 안수훈 목사 저서를 교훈삼아 연재한다.

제4절 전도대 조직과 전국 순회전도

동양선교회 카우만이 1901년부터 일본에서 전도에 아주 열심히 할 때, 미국교회로부터 일체 도움을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나, 다른 교단의 선교사들은 교파별로 미국본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활발하게 전도하며, 풍성한 재정으로 신바람이 나 있는 것을 보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로가 많았다.

다시 말하면 카우만 에게는 돈도 없고, 배경도 없었기 때문에 몸으로 직접 뛰면서 전도를 해야 하는 도랑을 막고 품어 내야 하는 사명감밖에 없었기에, 일본선교에 있어서 전도란 육탄전을 무기로 삶아 적과 싸운다는 군대 정신이 발동하여 노방전도와 축호전도로 일본 북해도에서 남단까지 방방곡곡 집집마다 찾아가야만 하는 직접 전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카우만이 설립한 일본 홀리네스 교회는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결과 물이었으나, 한국에서 1907년 성결교회가 시작될 때는 벌써 미국 장로교회와 감리회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미 진출해서 학교와 병원들을 세우고, 이러한 배경을 힘입어 간접전도를 하며, 전국 지방마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전도 기반이 형성되었고, 교회를 세우는 데는 무리가 없었으며, 교회만 세우면 대체로 부흥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조짐을 간과한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과 정 빈, 이 두 청년이 한국으로 입국하여 일본에서 카우만 정신으로 노방전도와 축호전도의 방법으로 길거리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예수 내 구주를 외치며 전도하므로 유치한 방법으로 전도한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초기에는 모여든 구도자들을 이때는 성결교회가 없으므로 타 교단의 교회들에 입적시켜 주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 두세 사람이 전도대원으로 시작했으나,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모였고, 밤에도 전도 대원들은 앞에서 장등을 밝혀 들고, 뒤에서 북을 치면서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교단을 이룩한 결과 한국에서 장로교회, 감리회, 성결교회라는 3대 교단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도는 힘을 얻게 되었고, 전국 각 지역 장터에서 5일 장날에 ‘믿기만 하오’라는 구호를 외치는 성결교회 전도대를 구성하여 파송하게 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천막을 치고 1주일 내내 전도 집회를 하므로 교세가 갑자기 흥왕하게 되었다.

특별히 1929년에는 전남수 목사가 미국에서 ‘에즈베리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한국성결교회 전도대에 합류하여 전국을 순회하는 전도 일선에 나서게 되자 이미 지방에 전도대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차창선, 김진문 목사와 함께 힘을 합하여 동역하므로 물불이 무섭지 않게 전도 집회와 부흥회를 이어가게 되었다.

1930년부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기를 구입하여 악대를 조직하고, 자동차에 모든 장비와 전도 대원을 싫고 이동하면서 기동력 있게 전국 각 시도를 찾아가 장막 전도 집회와 길거리 전도 집회를 병행하면서 실로 많은 구도자를 얻었고, 지역교회 설립에도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이처럼 ‘전국 순회 전도대’가 한국성결교회 성장에 많은 힘이 되어 주었고, 신자들도 개인전도와 노방전도, 축호전도에 열심을 내는 진짜 성도로 변모해가는 것을 보게 되면서 전국 각 지방별로 성결교회가 많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지역별로 자치제를 도입하고, 경성성서학원 졸업생들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전도에 박차를 기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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